한국교회사 속 인물(1) 박봉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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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속 인물(1) 박봉진 목사
  • 승인 2004.03.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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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밑에 천황” 외치다 순교

일제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사람들에 대한 핍박이 하늘을 찌를 때 성결교 박봉진목사(1890-1944)역시 일제의 잔혹함을 피할 수 없었다. 일본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던 일제는 하나님만을 경외하던 박목사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반역자로 낙인 찍으며 처절한 고문으로 육체와 정신을 짓밟았다. 다음은 일경과 박목사가 나눈 한도막 심문 내용.

일경 : 너는 무슨 이유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느냐? 박목사 : 하나님 외에 참 신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신사에 절할 수 없다. 일경 : 천황이 높으냐 예수가 위냐? 박목사 : 황도도 하나님이 내신 사람이다.

심문 이후의 상황은 잔혹함 그 자체였다. 모든 독립운동가들도 당했듯이 두 다리에 주리를 틀고 코와 입에 물을 퍼 부었다. 천정에 매달고 매질을 하면서 “천황이 높으냐 예수가 높으냐”라고 거듭 물으며 밤을 새웠다고 한다. 일경은 고문하면서 “천황이 높다고 한마디만 해라”며 회유했고 그 말만 하면 석방시켜 목회 잘하도록 지원을 할 것이라고 회유했다고 하는데 박목사는 끝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지 인간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라며 저항했다고 한다. 결국 14개월 만에 박봉진목사는 육체의 한계에 직면했고, 1943년 철원경찰서의 연락을 받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박목사는, 하지만 거듭된 고문으로 성한 곳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박목사가 별세한 것은 해방을 불과 1년 남겨놓은 1944년 8월15일 새벽4시. 그의 나이 53세였다.

박목사는 사실 금은방을 취급하는 사업가로 점포를 7개나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사업가 박봉진을 ‘순교자 박봉진’으로 만든 것은, 당대 유명 부흥사였던 이성봉목사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의 영향으로 늦은 나이인 43세 때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대)에 입학했고, 뜨겁고 곧은 신앙을 키웠다.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한 이성봉목사가 만든 곡이 바로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라는 곡이다. 사모 신인숙 전도사는 후일 혜회동교회를 개척하고 이를 순교기념예배당으로 삼는 등 곧은 신앙을 계승하는데 열심을 다했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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