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삶’ 모두 하나님 섬기는 것”…성경적 본질 회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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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삶’ 모두 하나님 섬기는 것”…성경적 본질 회복해야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7.01.1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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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중세 종교개혁의 명암, 한국교회에 어떻게 적용할까-1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조리한 관행에 맞서며 시작됐던 종교개혁이 올해로 500주년을 맞이했다.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배경으로 개신교가 태동했지만 오늘날 개신교는 개혁의 정신을 망각한 채 중세교회의 폐해를 답습해 가고 있다. 물량중심주의와 성장주의, 목회자의 각종 윤리문제로 사회적 신뢰를 잃고 있으며, 세력다툼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이 끊이지 않고 있다.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다양한 행사와 사업을 계획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성찰과 대안이 없다면 단순한 일회성 행사로 끝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주의 표어처럼, 본지는 새해를 맞아 한국교회의 새로운 도약과 부흥을 바라며 종교개혁 500주년 기획을 전개한다. 네 번째로 중세 종교개혁의 한계와 계승해야 할 정신을 알아보고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에 알맞은 이해와 적용점을 찾고자 한다.

종교개혁의 주요 기치, 그 오해와 진실

개신교의 태동을 이끈 루터의 종교개혁은 다양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운동으로 유럽 전역에 변화의 물결을 일으켰다. 단순한 기독교의 변화를 넘어 온 사회 전역의 변화를 일으킨 개혁운동으로 확산됐다. 루터가 일으킨 500년 전의 종교개혁은 많은 성과를 이뤘지만, 한계도 분명히 존재했다.

루터와 후세 종교개혁자들이 전한 신앙적 메시지는 동일했다고 할지라도 역사의 과정에서 메시지가 왜곡되거나 적용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규범을 양산하기도 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올해 한국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위해서는 유럽의 종교개혁 정신을 한국교회의 지평에서 새롭게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의 주요 기치로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을 통한 은혜’, ‘만인제사장직’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경이 우선시되기보다 교단법이나 교리가 우선되고,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면서도 마땅히 열매로서 동반되어야 할 행함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고 있다.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하면서도 목회자의 권위를 내세우고 성직자와 성도의 역할을 구별하고 제한시키고 있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세속주의와 교권주의에 빠져 타락했던 것처럼 한국교회가 이러한 전철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의 긍정적 측면을 계승하되, 시대적 현실로 인한 한계는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예배와 삶’이 동일한 예배로

루터의 종교개혁 메시지는 새로운 신앙패러다임을 제공했다. 가장 큰 변화는 예배의 변화였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사제의 권한이 중시되고, 예전에 따라 본질보다 형식이 강조됐던 예배는 보다 간소화됐다. 개인의 내면적 믿음을 강조하는 루터의 메시지는 당대 유럽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를 통해 성도들은 종교적 규범이나 인간적 전통이 아니라 성경 중심적 예배를 드리게 됐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러한 종교개혁 정신을 얼마나 계승하고 있을까. 추태화 교수(안양대)는 “루터와 칼뱅 등의 종교개혁가들은 성례전의 개혁을 통해 예배의 본질 회복을 추구했다. 중세의 예전은 지나치게 미신적이었으며, 하나님마저도 우상화했다. 종교개혁운동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차갑고 무자비한 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인만큼 가까운 관계로 회복하는 운동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는 양 극단에 있다. 한쪽에서는 지나치게 예배의 경건만을 강조하다보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반면 다른 쪽에서는 인간의 감정에만 의존해 성령체험, 은혜체험을 강조하다보니 예배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종교개혁의 예배 회복운동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교회의 전통을 중시하거나 감정의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 중심적 예배로 종교개혁의 정신을 상실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말씀’이 중심이 되는 예배야말로 종교개혁의 신앙정신을 따르는 예배라고 볼 수 있다. 추 교수는 “독일의 많은 교회는 예배시간에 모두가 일어나 말씀을 읽고, 세 번씩 봉독하고 나서야 설교자가 말씀을 전한다”며, “한국교회도 예배 순서나 방법의 변화를 통해서라도 성도들이 ‘말씀’에 집중할 수 있는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와 삶을 분리해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은 예배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경배하는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승구 교수(합동신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배와 삶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이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다”며,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으로 경배해야 한다. 삶과 예배는 상호 밀접하게 연결돼 있으며 둘이 분리되면 제의도 무의미해진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예배에는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연속적으로 읽고 듣는 순서가 있어야 한다. 헌금은 축복의 수단으로 드려지는 것으로 언급돼서는 안 될 것”이라며, 성경이 말하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할 것을 당부했다.

피의 대가로 얻어진 ‘성경’, 묵상 습관화해야

종교개혁운동을 통해 평신도들에게까지 보급된 성경은 수많은 선구자들의 피의 대가로 얻어낸 결과였다. 중세의 로마 교황체제는 성경을 독점하고 교회 공의회 교리나 교황의 칙서, 회칙, 교회법 등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 지침으로 내세웠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만이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신앙의 원천이고 규범임을 강조했다.

이렇듯 종교개혁자들의 목숨을 걸고 얻어낸 성경을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너무 쉽게 다뤄지거나 소홀히 여기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성경을 읽는 것도 습관화되어 있지 않다. 이는 한국교회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신학생들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지난해 본지가 신대원생 30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는 신대원생 중 71%가 하루에 성경을 34분 미만으로 읽는다고 답했으며, 신대원생 42%는 하루 17분 이하로 성경을 읽는다고 답했다. 이에 비추어 봤을 때, 일반 평신도들의 성경읽기 시간은 더욱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성경책은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게 됐지만, 교인들의 손에는 성경 대신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들려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어렵게 보편화시킨 성경이 신자들의 손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른 성경읽기의 중요성을 역설한 정재영 교수(실천신대)는 “성경을 바르게 읽고 이를 삶에 적용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며, “그리스도인은 내가 과연 하나님 말씀의 편에 서있는가를 고민하며 성경을 묵상하는 것을 습관화해야 한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피상적으로 성경을 볼 것이 아니라 귀납식 성경공부를 통해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며, “오늘날 한국사회가 가진 맥락에서 어떻게 성경이 말하는 대로 어떻게 살아가고 실천할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과 토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한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 안에서 은혜를 받기보다 온갖 신비스런 체험을 추구하며, 그것을 ‘은혜’로 여기는 이들도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결코 체험은 영적운동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 말씀만이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는 “최근 교회에 스며들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주의적인 정신을 강조하고, 교인들이 경험과 느낌을 따라 살게 만들며 성경을 가볍게 여기도록 만들고 있다. 그러나 ‘오직 성경’의 진리 위에 서야 이단사이비의 거짓교리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당부했다.

진정한 ‘믿음’은 행동이 동반되는 것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구원’을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 선행의 결함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공로와 업적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됐다. 그러나 루터와 칼뱅 등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강조하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벌과 죄를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구원을 해석하는 개신교의 핵심 교리인 ‘오직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됨’(칭의론)의 신학이 탄생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순간, 우리의 죄는 용서받고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개혁교회가 칭의의 교리를 강조함으로써, 성화를 위한 인간의 노력은 상대적으로 등한시 여기게 됐다. 그로인해 구원을 믿음의 행위가 결여된 ‘값싼 은총’으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는 이분법적 태도는 루터의 칭의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는 평가다. 신학자들은 루터는 중세 가톨릭교회가 인간의 선행을 구원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는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믿음을 강조한 것이지 선행을 간과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한국교회에 많은 윤리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도 ‘이신칭의’의 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해석한 것에 있다는 평가다.

김영한 박사는 “성화는 인간의 자력행위가 아니요, 신앙의 열매이자 칭의의 결실”이라며, “칭의는 행위 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서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라면, 성화는 신자에게 일평생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배덕만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도 “많은 사람이 루터가 이신칭의 논리로 윤리적 측면을 간과했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라며 “기독교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을 일으킨 당대 개혁가들은 그리스도인이 더욱 도덕적으로 우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성직자의 도덕성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잣대를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배 교수는 “목회자 윤리가 오늘날처럼 무너진 시대에는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이 성직자에게 요구했던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되찾을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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