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권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어”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② ‘오직성경’ 루터의 종교개혁 정하라 기자l승인2017.01.05l수정2017.01.17 21:29l13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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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개조 반박문’으로 로마 가톨릭의 부패 고발

인쇄술 발달과 독일 귀족층의 적극적 지원 받아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조리한 관행에 맞서며 시작됐던 종교개혁이 올해로 500주년을 맞이했다.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배경으로 개신교가 태동했지만 오늘날 개신교는 개혁의 정신을 망각한 채 중세교회의 폐해를 답습해 가고 있다. 물량중심주의와 성장주의, 목회자의 각종 윤리문제로 사회적 신뢰를 잃고 있으며, 세력다툼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이 끊이지 않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다양한 행사와 사업을 계획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성찰과 대안이 없다면 단순한 일회성 행사로 끝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주의 표어처럼, 본지는 새해를 맞아 한국교회의 새로운 도약과 부흥을 바라며 종교개혁 500주년 기획을 전개한다. 두 번째로 중세시대 종교개혁운동에 불을 지폈던 마틴 루터의 사상과 일생을 통한 개신교 태동의 배경을 살피고자 한다.

▲ 1521 4월, 보름스 제국의회에서는 루터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지만, 루터는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기도하며 거절했다. 작품은 '보름스국회 앞에 선 루터'

루터의 종교개혁…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종교개혁은 루터 한 사람의 공로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루터 이전의 수많은 신앙인들이 목숨을 걸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실체를 고발하고 ‘오직 성경’이라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일으켰던 역사의 과정이었다. 루터의 시대에 와서 수많은 시민들의 공감을 얻게 되면서 유럽 전역까지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평범한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계기로 종교개혁운동 전면에 나서게 된다. 16세기 초, 부패한 생활로 적자에 허덕이던 로마 가톨릭교회는 돈을 지불하면 개인의 죄를 용서해 주는 면죄부를 판매했다. 교황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공공연히 면죄부를 팔았다. 당시에는 “돈궤에 주화가 떨어지면서 딸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연옥에서 영혼이 빠져 나온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면죄부는 당대 사람들에게 있어 무슨 죄를 짓더라도 벌을 면하게 하는 보증서가 되었고, 회개는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에 루터는 1517년 독일의 비텐베르크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며,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폐단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자로서 그 역할을 독점하려는 교회에 반대하고, 신자들 누구나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음을 공표했다. 또한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루터의 평등사상은 독일 군주들이 더 이상 로마 교황의 지시 아래 있지 않으며, 일반 성도들도 성경을 해석할 수 있고, 교회에 문제가 있을 시에 군주들도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병훈 박사(고신대)는 “루터는 당시 교회가 가졌던 수직적 위계질서를 부정했으며, 평신도와 사제들, 세속 군주와 주교들 사이에 어떠한 위계적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루터를 통해 모든 성도들이 직접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게 됐으며,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며, 그렇기에 하나님께 곧장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다”며,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은 이신칭의론과 함께 개신교 역사에 남긴 가장 큰 기여”라고 평가했다.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종교개혁의 물결

당시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교황권에 대항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일이었지만, 루터는 반박문을 통해 교회가 인간의 죄를 면하거나 구원할 수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서야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와 가톨릭의 전면적인 대립으로 이어졌으며, 당시 교황의 횡포를 못마땅하게 여긴 독일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이후 독일어로 번역된 ‘95개조 반박문’은 한 달 만에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으며, 이는 면죄부 판매의 급감으로 이어지게 된다.

루터의 반박문으로 논란이 거세지자 1518년 루터는 교황의 사절인 카예탄 추기경에 의해 심문 당했으며, 1519년에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가톨릭 신자로 신학교수인 에크(John Eck)와 공개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루터는 신학교수인 에크와의 논쟁에서 “교황의 권위는 위조다. ‘오직 성경’만이 신앙의 도리와 생활의 규범이 되므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자”고 주장했다. 또 “연옥은 외경인 마카비서에 나온다. 마카비서는 성경이 아니며, 연옥은 잘못된 것”이라며, “면죄부 판매와 고해성사는 인간에게서 나왔으며, 성경의 교훈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루터는 자신의 입장이 정통 가톨릭교회와 병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에크는 루터의 교리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제 루터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할 것인지 정통 가톨릭을 떠나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만들어야 할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게 된 것이다.

1521년 신성로마제국 보름스 제국의회에서는 루터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지만, 루터는 이를 거부했으며, 결국 로마제국은 루터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루터는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신하며, 라틴어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1522년 루터가 내놓은 독일어 성경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 당시 루터의 성서번역은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독일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독일 표준어 확립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루터에 의해 본격적인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스위스의 츠빙글리, 프랑스의 칼뱅 등이 운동에 동참했다. 특히 칼뱅은 엄격한 금욕생활과 예정설을 주장하며,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다. 루터와 가톨릭교회와의 투쟁은 계속됐고, 마침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루터를 정식 교파로 인정을 받게 된다.

‘인쇄술’의 발달로 시민들의 적극적 지지 얻어

사실 루터가 주장했던 95개조 반박문의 내용이나, 가톨릭의 부정부패에 대한 고발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로마교회는 루터를 고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루터는 이미 오래전에 정죄 받은 왈덴시스와 알비겐시스의 이단 교리를 다시 끄집어냈을 뿐이다.” 과거 알비겐시스와 왈덴시스 그리고 후에, 위그노파, 위클리프(롤라드) 성도들도 똑같은 종교개혁 운동을 벌였지만, 십자군과 종교재판 등의 박해를 겪으며 공개적으로 항거하기 어려운 상황에 몰렸다.

그렇다면, 루터 시대에 와서 종교개혁운동이 빛을 발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놀라운 배경에는 ‘인쇄술’의 발달이라는 시대적인 변화와 독일 귀족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1440년경 쿠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기를 통해 루터의 반박문이 독일어로 번역, 출판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독일을 넘어 전 유럽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지난 수세기 동안 로마교회는 성경책을 불태웠으며, 위클리프나 가톨릭 교리에 반하는 내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쓴 책들도 불태워 없앴다. 그러나 인쇄술의 발명으로 그러한 책들이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1517~1520년까지 루터가 쓴 30종의 저술들이 30만부 이상 팔려나간 일을 볼 때 인쇄술의 발달이 시민들의 의식 개혁과 종교개혁 운동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루터는 1520년 ‘독일민족의 그리스도교 귀족들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써서 독일 귀족들이 독일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압수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에 공감한 귀족들은 루터를 적극 지원했고, 독일 귀족과 루터가 연합할 근거가 마련됐다.

김영한 박사(숭실대 기독대학원 설립자)는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루터 시대에 와서 종교개혁운동이 무르익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독일의 영주들이 루터의 편에 섰고, 각계각층의 지원이 있었기에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종교개혁운동의 핵심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루터는 가톨릭의 기복신앙이나 성인 숭배, 유품 숭배사상을 집어던지고, 오로지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되돌아갈 것을 역설했다”고 덧붙였다.

반면 루터의 종교개혁이 갖는 한계도 있다. 당시 지배자들 밑에서 오랫동안 억압에 시달려온 농민들은 루터의 평등사상을 지지하며, 루터를 봉건적 억압의 굴레를 없애버린 인물로 숭배했다. 하지만, 이후 농민들의 폭동이 거세지자 루터가 독일 제후의 편에 서면서 특권층 비호세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절대적 권위였던 로마 교황청의 권위에 당당히 맞선 루터가 있었기에 종교개혁운동이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를 수 있었고, 오늘날 개신교가 탄생하게 됐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루터는 처음부터 거창한 개혁을 꾀하거나 새로운 교회를 세울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그는 복음으로 돌아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원했던 것뿐이었다. 한국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서도 거창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변화를 감지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 과감히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이승구 교수(합신대)는 “루터의 외침을 듣고 함께 따랐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종교개혁이 가능했고, 개신교가 태동할 수 있었다”면서, “이처럼 우리는 늘 주변의 비성경적인 것들을 돌아보고 고치려 해야 하며, 오늘날에도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개혁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하라 기자  jhara@igood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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