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움직이는 성경이 된 자들…중세교회의 여명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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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움직이는 성경이 된 자들…중세교회의 여명을 밝히다”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6.12.2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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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500주년 특집 ① 중세시대 종교개혁, 그 전조현상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조리한 관행에 맞서며 시작됐던 종교개혁이 올해로 500주년을 맞이했다.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배경으로 개신교가 태동했지만 오늘날 개신교는 개혁의 정신을 망각한 채 중세교회의 폐해를 답습해 가고 있다. 물량중심주의와 성장주의, 목회자의 각종 윤리문제로 사회적 신뢰를 잃고 있으며, 세력다툼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이 끊이지 않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다양한 행사와 사업을 계획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성찰과 대안이 없다면 단순한 일회성 행사로 끝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주의 표어처럼, 본지는 새해를 맞아 한국교회의 새로운 도약과 부흥을 바라며 종교개혁 500주년 기획을 전개한다. 첫 번째로 중세시대 종교개혁의 전조현상을 살피고, 선구자들의 외침을 통한 한국교회의 과제를 찾고자 한다.

수많은 거위 잿더미 속에 피어난 ‘희망’

종교개혁가 루터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려져 있지만, 종교개혁 이전의 선구자들의 삶과 사상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부터 부패한 가톨릭의 교황권에 대항해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 권위로 따를 것을 촉구하며 죽음까지도 불사한 개혁의 외침이 있었다.

“너희가 비록 지금 거위를 죽여 없앨지라도 하나님은 100년 안에 그 거위 잿더미로부터 백조를 일으키실 것이다. 이로써 결국 아무도 진리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13세기 보헤미아 지방에서 열렬한 종교개혁 활동을 하던 얀 후스(Jan Huss, 1369~1415)가 남긴 말이다. 그는 당시 교황무오설에 반대하고, 성경의 권위가 교회 간부의 의견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단으로 정죄 받아 1415년 화형을 당해 순교했다.

얀 후스가 이 말을 남기고, 죽은 뒤 약 100년이 지난 1517년,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가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는 일이 일어났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독일 민중을 중심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됐다.

중세교회는 영적 타락으로 신앙과 도덕적으로 몰락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사도적 신앙을 지키며, 성경적 진리를 선포하다가 순교한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 있었다. 종교개혁가로는 얀후스를 비롯해 최초의 신구약 영어성경을 만든 위클리프, 가톨릭의 부정부패에 대항해 교회의 회개를 외친 사보나롤라가 있다. 얀후스와 위클리프가 교리적인 개혁을 시도했다면, 사보나롤라는 주로 교회 내부의 개혁을 요구했다.

▲ 롤라드는 위클리프의 후예로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성경을 한권씩 통째로 외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을 칭한다. 사진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1월 개막한 롤라드의 이야기를 조명한 뮤지컬 ‘더북(The Book)’의 공연모습.(사진제공:아트리)

교황권에 대항해 죽음까지 불사한 사람들

이들의 공통점은 로마 교황에게 순응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 권위로 삼고 따랐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시 ‘이단자’라 불리며 대부분 순교 당했지만, 후에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프로테스탄트(개신교)가 탄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말씀처럼,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부터 수많은 선구자들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이승구 교수(합신대, 조직신학)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니었다면,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마틴 루터는 이전에 비슷한 주장을 했던 사람들처럼 이단자로 몰려 순교당했을 것”이라며, “루터의 종교개혁 사건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루터의 외침에 동참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종교개혁은 루터 혼자의 힘으로 이뤄진 역사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주후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순결하고도 진실된 카타콤 신앙은 사라지고 교회는 권력화 되기 시작했다. 주후 590년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교회의 절대권을 인정하고, 주후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에게 로마 황제의 칭호를 부여했다. 그때부터 교황이 황제와 왕을 추인하는 절대 권력을 갖게 되면서 중세 교회는 암흑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당시 정치권과 결탁해 이교 철학과 풍습을 교회 안으로 들여왔다. 이러한 흐름에 대항해 12세기 중반 프랑스 남부에서는 가톨릭 의식을 배격하고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알비겐시스 운동’과 ‘왈덴시스 운동’이 일어났다.

로마 교황청은 자신이 가르침을 거절하거나 대항하는 이들에게 참혹한 고문과 박해를 자행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종교재판’이다. 1163년 교황 알렉산더 3세가 트루 종교회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다.

1183년 교황 루시우스 3세는 모든 ‘이단자’(그리스도인들)를 제거하기 위해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종교재판’을 명했으며, 이는 십자군으로 이어졌다. 교황권은 하나님을 대신해 ‘이단자’들을 징계한다는 명분으로 수만 명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거나 죽였다. 이 종교재판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그리스도인들은 후스파, 알비겐시스, 왈덴시스, 위그노파, 위클리프(롤라드) 성도들이다.

‘오직 성경’이 종교개혁 가능케 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외침 중심에는 ‘성경’이 있었다. 중세 가톨릭은 성경의 해석권이 사제들만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사제의 임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한다고 했지만, 교회법보다 성경이 더욱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특히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 불리는 ‘위클리프(John Wycliffe,1320~1384)’는 최초로 신구약 영어성경을 만들었으며,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대항해 진실한 설교를 전했다. 특히 그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천주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화체설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설교를 통한 면죄부 판매, 죽은 자를 위한 미사, 연옥신앙과 성모 마리아상 숭배, 성유물 숭배 등을 모두 비성서적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성경 중심의 신앙을 강조한 그는 성경만이 신앙의 척도이며,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표준이라고 강조했다. 그렇기에 그에게 가장 급한 일은 대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기에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야만 했다. 보통 한 권의 성경을 필사하는데 열 달 정도가 걸렸으며, 그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성경이 필사되자 영국 국회는 법령을 제정, 위클리프의 성경을 보급하지 못하게 했다. 그로 인해 누구든지 위클리프의 성경 역본을 갖고 있다가 적발되면, 성경책을 목에 매단 채 화형당해야 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배분하고, 복음을 확산시키기 위해 ‘롤라드(Lollard)’라 불리는 평신도 설교자들을 배출했다. 이들을 통해 귀족과 식자층만 알던 라틴어 성경이 영어로 번역돼 확산되자, 교황청은 살인까지도 주저치 않으며 이들을 박해했다. 번역된 성경을 지닌 것만으로도 목숨을 위협받던 롤라드들은 성경을 한 권씩 통째로 외워 감찰사제의 눈을 피해 광장에서 성경을 암송했다. 시민들은 이들이 암송하는 성경을 받아적으며 복음을 마음에 새겼다. 이후 위클리프의 후예인 롤라드는 영국 해협을 넘어 세계 각지에서 복음을 전했다. 로마 교회는 위클리프가 살아 있는 동안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제거하려 했으나 그 시도는 매번 실패했으며,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최고 등급의 저주를 내렸다.

그들은 위클리프의 뼈를 루터워스(Lutterworth) 교회 뒤뜰에서 끄집어내어 완전히 불태우고 그 가루를 스위프트(Swift) 강에 뿌렸다. 지리적으로 스위프트 강의 물줄기는 영국에서 가장 긴 강인 세번(Severn) 강으로 들어가고 세번 강은 결국 영국 해협으로 흘러간다. 이는 그가 전한 복음의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이에 대해 한 신학자는 “이 시냇물은 그 재를 세번강으로, 세번강은 영국해협으로, 영국 해협은 대양으로 옮겨주었다. 위클리프의 재는 오늘날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그의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는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위클리프의 사상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위한 위대한 밑거름이 됐다.

정성구 박사(한국칼빈주의연구원 원장)는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의 여명기에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 및 행위의 유일한 법칙임을 설교하다가 순교의 잔을 마신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롤라와 같은 선구자들로 말미암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16세기 종교개혁을 이해하려면, 위클리프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며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이 복음과 신앙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회장 김명혁 목사는 “종교개혁의 목적은 과거의 이념을 파괴하고 새로운 만들자는 것이 아닌, 참된 전통의 회복에 목적이 있었다”며 “중세시대 종교개혁가들은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에 맞서 순수한 기독교 신앙의 회복을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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