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종교개혁, 기독교를 넘어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를 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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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 기독교를 넘어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를 흔들다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7.01.10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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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16세기 종교개혁이 유럽 전반에 미친 영향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조리한 관행에 맞서며 시작됐던 종교개혁이 올해로 500주년을 맞이했다.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배경으로 개신교가 태동했지만 오늘날 개신교는 개혁의 정신을 망각한 채 중세교회의 폐해를 답습해 가고 있다. 물량중심주의와 성장주의, 목회자의 각종 윤리문제로 사회적 신뢰를 잃고 있으며, 세력다툼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이 끊이지 않고 있다.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다양한 행사와 사업을 계획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성찰과 대안이 없다면 단순한 일회성 행사로 끝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주의 표어처럼, 본지는 새해를 맞아 한국교회의 새로운 도약과 부흥을 바라며 종교개혁 500주년 기획을 전개한다. 세 번째로 중세시대 종교개혁운동이 종교를 넘어 유럽의 사회, 경제, 문화 등 전반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전통과 권위 사라지고 성경적 예배로 변화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죽은 후에도 그가 일으켰던 신학적 운동은 계속 파져나가 16, 17세기 유럽 전역에서 꽃을 피웠다. 루터의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칼뱅의 교리는 프랑스와 영국, 스위스 전역에 영향을 끼쳤으며,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청교도의 시작을 이끌었다.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단지 기독교 역사뿐 아니라 근대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즉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의 봉건적 잔재를 떨어내고 근세를 구분 짓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근대 자본주주의 기반이 되는 사상적 바탕을 제공했다.

먼저 교회 안에서는 예배의 변화가 일어났다. 중세 가톨릭교회 안에 남아있는 비성경적인 모든 예배의 요소가 제거 됐으며, 성경적인 교리와 예배를 회복하게 됐다. 종교개혁을 통해 중세 가톨릭교회의 인간적 전통과 권위가 사라지고 성경 중심적 신앙과 생활이 교회 안에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의 예배는 보다 단순해졌으며, 성만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즉 설교에 초점이 맞춰졌다. 성직자 중심의 화려한 색의 의복과 평신도의 이해가 힘든 라틴어가 사라졌고 일상적 언어가 대신 사용됐다. 교회 건물 역시 급격히 변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과 성인의 상이 우상 숭배적이며, 사람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기독교인들에게 영적 실재에 대한 잘못된 상을 전달해 준다고 비판했다. 그로인해 그림과 조각들이 파괴됐으며, 정교한 장식들도 하얀색으로 덧칠해 버렸다.

사제와 성가대원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중세 교회음악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루터는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강조하면서 회중의 찬송을 장려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나 칼뱅은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도구로 교회음악을 높이 평가했지만 반주 없이 ‘시편’만 노래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소극적 자세를 취했다. 개신교가 설교를 보다 강조함으로써 제단이 아니라 강단이 교회의 중심이 됐다. 성만찬의 빵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한다고 믿지 않았던 츠빙글리는 제단을 보통의 탁자 정도로 격하시키고, 그 둘레에 신자들이 앉아 성체를 나누도록 했다. 예배에 임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예배를 하나님이 임재하는 거룩한 성전을 의미하는 예배당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일터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으로 인식이 변화됐다.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자유와 평등사회 야기

중세시대의 종교개혁은 단지 종교뿐 아니라 사람의 의식을 평등화하고 민주사회의 토대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그 의회를 통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종교적으로도 더욱 넓은 관용을 갖게 됐으며, 계급 구조적 사회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평등과 자유의 시대가 도래했다.

특히 루터는 ‘만인제사장설’을 따라 일반 성도와 사제 사이에는 어떤 위계적이며 신분적 구분이 있을 수 없음을 강조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기독교인이 동등하며,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가톨릭 사제들만이 보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평신도와 세속 군주와 주교들 사이 어떤 위계적 차이가 없다는 루터의 발상 자체는 유럽에서 민주사회를 이루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를 통해 중세시대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에 대한 의식이 더욱 확고해졌다. 만인제사장설은 신앙적인 평등을 넘어 계급 타파와 평등사상의 혁명적 진전을 가져왔다. 추태화 교수(안양대)는 “종교개혁은 자아발견이라는 분야에서 대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중세만 해도 신앙도 교회와 사제가 관리하는 차원이었고, 개인은 순종만 하면 됐다. 그런데 만인제사장이 신앙의 차원을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유혈극을 몰고 오기도 했는데, 1524~1526년 발생한 농민전쟁이 대표적이다. 당시 지배자들 밑에서 억압에 시달려온 농민들은 루터의 평등사상에 지지를 보냈고, 급진적 개혁자 토마스 뮌처의 주도로 대 폭동을 일으킨다. 이에 루터는 독일 제후들에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폭동을 진압할 것을 허락한다. 이후 1524년 귀족들의 군대는 10만여 명의 농민들을 살해하자 루터는 재빨리 태도를 바꾸었으나, 이미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후였다.

배덕만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는 “농민전쟁을 겪으며, 루터의 사상이 더 민주적이고 민중 지향적 운동이 될 수 있었지만, 루터가 영주의 편에 서게 되면서 상당이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엄밀히 루터의 종교개혁은 가톨릭과 영주 중심의 잔재를 끌고 가지만, 이후 종교개혁자들이 새로운 계급과 투쟁을 이끌며 근대 민주주의나 자본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설명했다.

▲ 유럽 국가에 씻을 수 없는 피해를 남긴 30년 전쟁이 끝나고, 1648년 개인의 신앙 자유를 허락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졌다.

‘성속이원론 철폐’로 근대 자본주의 발달 불러와

종교개혁운동은 당시 유럽 전역에 자리 잡아 가고 있던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더욱 구체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종교개혁 전에는 성직과 관련된 일만이 귀하고 다른 일은 천하다는 성속 이원론적 생각이 있었지만, 이후로는 종교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일이 한님이 주신 중요한 일이라는 인식이 형성된 것이다.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연한 칼뱅(John Calvin, 1509~1564)을 통해 더욱 발전됐다. 칼뱅은 예정설을 주장하며, 중세교회의 성속이원론과 사제주의에 반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모든 노동이 다 거룩하다는 ‘직업 소명론(Calling)’을 주장했다. 이러한 교리는 상공업에 종사하던 시민계급의 환영을 받았으며, 이 땅의 모든 일이 하나님이 주신 중요한 일이며, 모든 사람이 가치 있다는 인식으로 확대됐다. 이후 전 유럽에 걸친 종교개혁 전쟁을 치르면서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은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정착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칼뱅은 전통 가톨릭교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노동의 가치를 인정했으며 근검절약을 통해 얻어지는 이익은 정당한 것으로 자유롭게 부를 축적할 수 있다고 보았다. 상인들의 이윤추구 역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의식변화로 상인계층과 이들이 연계된 제후 세력이 성장한 반면, 당시 막강했던 교황권력은 쇠퇴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는 자본주의의 정신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했고, 18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바탕이 됐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종교개혁의 역사가 유럽 근대 자본주의 사상의 기초가 됐다고 분석했다. 그의 역작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년)’에서는 16~17세기 종교개혁의 윤리관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태동시켰는지 탁월한 분석을 제시한다. “프로테스탄트 금욕주의는 지속적인 직업노동을 금욕을 위한 최고의 수단이자, 신앙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증표로 평가했다.”

칼뱅의 ‘직업소명설’은 자본주의 정신을 확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자본축적으로 인한 부의 유혹은 각종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부의 축적을 애써 숨겨온 자본가들과 영주, 제후들이 앞장서 개신교를 받아들이면서 교회는 자본주의 대안사회가 되지 못하고 국가 자본주의에 그대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금욕적 신앙은 부의 증가를 가져왔지만, 이것이 금욕적 신앙을 무너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의 한계와 계승해야 할 정신

종교개혁은 이러한 많은 성과를 냈지만, 한계도 분명히 존재했다. 특히 개신교와 가톨릭의 30년 전쟁은 1648년,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면서 끝이 났지만, 독일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비극적인 전쟁으로 남게 됐다. 또 여러 나라들이 전쟁에 가담하면서 전 유럽이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스페인은 유럽의 정치무대에서 퇴출되는 신세가 됐으며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체코도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가와 종교 권력의 관계도 완전히 새로 정립됐다. 당시 절대적 권위를 가졌던 가톨릭은 기독교의 수많은 종파 중 하나로 지위가 격화됐으며, 여러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종교적 관용이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세속적인 사유체계의 등장과 함께 신앙의 절대적 권위에서 벗어나 인간중심의 사회를 강조하는 계몽주의 시대의 기초가 마련됐다. 또 많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정치를 종교보다 우선시하게 됐다. 교회 권위의 탈 중심화를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은 17~18세기의 철학자, 과학자이 세상과 인간의 일을 순수하게 세속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셈이었다.

배덕만 교수는 “종교개혁의 가장 대표적인 한계는 종교개혁 운동이 정치권력의 후원에 힘입어 진행된 것이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세력 간의 갈등으로 격하되면서 가톨릭 영주들과 개신교 영주들 간의 전쟁으로 귀결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를 통해 종교는 공적 영역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적영역으로 밀려나게 됐다”며, “부패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종교개혁이 믿음을 공적영역에서 추방시키는 것이 되고 말았다”고 진단했다.

끝으로 배 교수는 “종교개혁은 분명 많은 성과를 이루었지만 한계도 분명했다”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진단하고, 어떤 부분을 계승해야 할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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