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대학들과 교회의 학문(스콜라주의)과 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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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대학들과 교회의 학문(스콜라주의)과 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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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1.21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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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신학은 교리문제들과의 관련 속 근본원칙을 검토

중세대학들이 생겨나고 학문이 발전하면서 교회의 학문으로 스콜라주의가 형성됐다. 교황의 권력은 정점에 이르렀고, 교회의 학문도 두 번째 스콜라주의시기로 최고조에 달했다. 학문은 정신생활을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패권을 차지했고, 놀라운 신학의 체계들이 확립됐다. 13세기 스콜라주의의 발흥과 더불어 학문의 발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와 대학들의 출현, 도미니쿠스와 프란키스쿠스 수도회의 두 걸식수도단들이 학문적 기여에서 찾을 수 있다. 스콜라주의의 이러한 전성기를 사람들은 1320년에서 1350년에서 그 시작점을 찾는다. 옥캄의 빌헬름(1288-1347)이 새로운 시대의 길 안내 표지자로서 경계에 선다. 그리고 후기 스콜라주의의 창조력과 독창성은 14, 15세기에 나타난다. 물론 스콜라주의 옆에 신학의 다른 형태들이 중요성을 차지하지는 않았고, 이미 이전부터 있었던 것들의 실제적인 연관성 속에서 발전했다.

아크뷔노의 토마스와 스코틀랜드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1266-1308)의 학문방법이 “옛 방법(옛 길)”으로 여겨질 때, 14세기에 옥캄의 빌헬름과 그의 추종자들의 방법을 “새로운 방법(새 길)”이라고 부르게 됐다. 새 길을 걷는 자들을 소위 유명론 자들(명목론 자들)이라고 했다. 언어논리학과 경험론의 법칙들에 일치하는 인식론의 “새로운 길”은 철학에서는 논리학 및 자연과학에 집중하고 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유효한 진리들로써 신앙의 가르침들의 형의 상학의 논증으로부터의 전향의 어떤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옛 길”을 걷는 자들의 주장은 알베르투스, 토마스와 둔스에 의하여 철학과 신학에서 단지 전통적인 입장만 반복하였던 사고와 존재에 대한 일치의 주장과 함께 각인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사상을 반영하고 있고 이들을 현실주의자(실재론자)들 혹은 형식주의자들이라고 한다. 파리 대학은 당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명론의 중심지였다. 또한 프라하와 쾰른이 실재론의 영향 아래 남아 있는 동안에 비엔나와 에르푸르트 대학은 유명론의 영향 아래서 고려될 수 있다.

교육계획 정착을 위한 “길의 논쟁”은 15세기에 신학학부들을 위해서 보다 먼저 철학부들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학의 신학은 교리문제들과의 관련 속에서 근본원칙을 검토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유명론의 결합을 은혜론의 범주에서 처음 보인 파리의 스콜라주의 학자는 리미니의 그레고리우스(1300-58)이다. 옥함의 빌헬름의 철학은 14세기의 옥캄주의 안에서 지속됐다. 유명론과 종교개혁신학은 14-15세기에 점점 보편적인 정신생활과 더욱 강력하게 결합되어갔다. 그것을 위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학자는 파리대학의 요한 게르송(1363-1429)이었다. 그는 스콜라철학을 신비주의를 통하여 보충하였고 가르침을 강력하게 실제와의 연관의 의미 안에서 개혁하기를 원했다. 그의 이와 같은 개혁 노력은 1393/95년 이래로 브뤼게와 파리대학사무국의 장을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한 극단의 보편적 실제론의 토대 위에서 문헌적으로 공헌한 사람은 이미 이전에 언급했던 존 위클리프(1330-84)를 들 수 있다.

후기 스콜라주의에서 새로운 시대로 옮겨가는 시기인 15세기의 방대한 신학문헌들은 아직도 정확하게 연구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스콜라철학의 가르침의 형태를 묵상, 신비, 성례, 윤리를 중심한 경건실천의 강조와 깊이 연관시켰다. 뛰어난 유명론의 대변자는 튀빙겐 대학의 교수였던 가브리엘 비엘(1410-1495)로 “현대의 경건”과 “현대의 길”을 결합시킨 자였다. 하지만 그는 아크뷔노의 토마스와 둔스 스코투스를 고려함으로써 그 일이 가능했다.

14-15세기에서는 스콜라철학의 지적인 학습방법과 더불어 신앙의 경험과 하나님을 바라봄(관상)을 구현하는 “독일의 신비주의”가 주요한 역사주제로 다루어진다. 14세기 가장 의미 있는 신학자로 도미니쿠스 수도사 요한네스 타울러(1330-1361)와 하인리히 셔이세(수소)(1295/97-1366)를 들 수 있다. 이 둘은 엑크하르트의 제자들이지만 서로 다른 신비주의 방법을 사용했다. 신비신학의 전통 배경 위에서 새로운 신학의 시도는 쿠사누스의 니콜라우스(1401-1464)에 의해 대표된다.

13세기부터 교회가 학문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을 동안에 문화는 이미 12세기에 시작된 교회속박으로부터 해방이 계속됐다. 성직자들의 지도적 문학의 위치는 기사계급에 의해 밀려났다. 시문학의 특성이 영적인 소재와 나란히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 속에서도 그리스도교의 문학은 여전이 의미가 있었고 발전을 지속했다. 또한 형성되는 예술분야에서도 교회의 주도권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12, 13세기에는 동방의 영향들로 보이는 고대교회로부터 내려오던 로마네스크와 12세기 후반에 시작하여 15세기까지 꽃을 피웠던 고딕의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건물들이 세워졌다. 11-13세기 사이에 조각과 회화도 교회건축술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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