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보수적 신앙과 신학사상을 갖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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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보수적 신앙과 신학사상을 갖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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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10.07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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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 교회의 신학

한국 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선교를 주도했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소속 교파로부터 교회의 외적유형들뿐만 아니라 해당 교회법과 신앙고백들까지 넘겨받았다.

장로교 총회설립 후 10년 1922년 총회에서 통과되었던 교회헌법은 1907년의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채택하였고, 행정체계는 미국장로교를 답습하였으며, 북장로교의 권징의 조례를 일부 수정하여 채택하였고, 남장로교의 예배의 모범을 일부 수정한 내용을 포함하였다. 또한 초기 한국 교회의 신학은 선교사들 자신의 신앙과 신학적인 견해들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

대부분의 초기선교사들은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신앙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자연스럽게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보수적 신앙과 신학사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신학의 전통이 되었다. 적어도 1920년 중엽까지는 보수적이며 복음적인 신학이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을 지배하였다. 곽안련(찰스 알렌 클락, 1876-1961, 맥코믹신학교 출신)은 초대 선교사들이 옛 스코틀랜드의 언약신학을 따르는 후손들(청교도적 칼빈주의)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고 평가한다. 마포삼열 선교사(맥코믹신학교 출신)는 한국 선교의 희년을 기념하는 설교에서 자신이 구원의 복음 즉, 십자가의 도 이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장로교회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내의 신학논쟁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1893년부터 1901년까지 한국에서 40명의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일했는데 그 중 16명이 프린스톤신학교 출신이고, 11명이 맥코믹신학교 출신이었다. 프린스톤 출신 선교사들이 재학할 당시 교수로는 미국 장로교의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던 찰스 핫지(1797-1878)의 아들 A. A. 핫지(1823-1886)와 개혁주의 성경관을 가장 강력하게 변호했던 ‘타협을 모르는 칼빈주의자’ 베자민 워필드(1851-1921)가 있었다. 워필드는 스스로 기계적 영감설과 구별했던 축자영감설을 주장했다. 초기 선교사들이 이들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엽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타 교파에 관대했고, 감리교 설교자들이나 다름없이 뜨겁게 설교했다.

1918년에 평양신학교 신학지인 ‘신학지남’이 창간되었다. 주로 설교와 신자들의 실생활에 대한 글들이 실렸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1919년 삼일운동의 주역을 담당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고문을 당하고 순교하고, 옥고를 치렀음에도 ‘신학지남’에는 이를 위한 간접적인 시사마저도 없었다. 곽안련은 일찍부터 “교회가 정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우리들은 믿는다. 교회는 영적 기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현재의 정부와 그 어떤 다른 정부에 대해서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라고 밝혀왔었다.

물론 선교사들에게 프린스톤의 신학이 그대로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 교회의 종말론적 신앙은 전천년설을 믿는 신앙을 가졌는데 이는 상당히 세대주의적으로 채색된 것이었다. 그러나 개혁파교회는 무천년설을 지지한다. 종교개혁자들인 루터와 칼빈은 천년왕국사상에 동요하지 않았다. 사실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전천년설이 더 성서적이라고 믿었던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으며 무디의 부흥운동에서 영향을 받았던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이후 보수적 장로교회 안에서 점차적으로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1927년에 남궁혁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평양신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1930년에는 이성휘와 박형룡이 교수가 됨으로써 한국인 교수진이 보강되었다. 신학지남에 나타난 이들의 글들은 남궁혁과 이성휘는 주로 성경강해의 글들을 기고했고, 박형룡은 변증학과 조직신학분야에 관한 글들을 주로 썼다.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는 장로교신학교의 ‘신학지남’보다 2년 앞선 1916년 2월에 신학지로 ‘신학세계’를 창간하였다.

주일을 성수하고 덕목으로 춤과 주초, 카드를 금지하고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였던 청교도신앙의 전통은 19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1926년 캐나다교회가 연합교회로 발전하면서 일본과 미국의 유학파들을 통하여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하는 계기가 되었다.(김장호 목사사건) 또한 1930년대에 이르러서 파벌들 간에 신학적인 갈등이 빚어졌다. 서북지역대 비서북지역의 구도로 웨스트민스터대학 출신의 마켄과 프린스톤대학 출신의 한경직, 송창근 사이에 갈등과 근본주의 선교사들과 근대주의자들(게일, 김재준 등) 사이의 대립이 발생하였다. 1935년 제24차 총회에서 평양노회와 길선주가 아빙돈 단권주석사건(유형기 번역편집)을 문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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