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안되는 상황에도 순종하면 주님이 일하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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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안되는 상황에도 순종하면 주님이 일하셔”
  • 손동준 기자
  • 승인 2014.08.1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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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박수영 선교사, 3살때 뇌염주사 잘못 맞고 후천성 뇌성마비 얻어
▲ 후천성 뇌성마비를 극복하고 태국에서 13년째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박수영 선교사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편집국 사무실에 들어섰다. 3층 건물을 뛰어 올라오느라 지쳤는지 물으려는 찰나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제가 지체장애 3급입니다. 팔다리 4개 중 2개를 못쓰고, 언어장애나 보행장애가 동반되는 사람이 3급 판정을 받죠.”

박수영 선교사(48세)는 3살때 뇌염주사 부작용으로 후천성 뇌성마비를 얻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태국에서 13년째 사역 중이다. 그런 그를 최근 본보 사무실에서 만났다.

설명이 없었다면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만큼 박 선교사의 장애 정도는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지도 앉지도 못했죠. 걸어다니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뒤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계속 좋아지는 중입니다.”

박 선교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자신을 도와주던 친구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손발이 되어준 한 친구가 어느날 저를 붙잡고 기도를 해주더라구요. 그때부터 하나님이 대체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죠.”

불교 신자였던 부모님의 핍박이 거셌지만 그의 몸이 좋아지기 시작하자 부모님의 마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는 두 분의 신앙이 더 훌륭해요. 하나님이 저를 통해 부모님을 구원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츰차츰 증세가 호전되다보니 교회에 가는 것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수련회에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수영아, 내가 너를 낫게 해주면 너는 내게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몇 번이고 같은 음성이 들렸어요. 그때마다 저는 '주님, 제 몸이 불편한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거절했지만 음성은 계속 됐지요.” 결국 그는 그 수련회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시면 어눌한 몸이지만 드리겠습니다'하고 서원했지요. 그렇게 목사가 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백석대 신학과에 입학한 그는 3학년까지 학업을 마친 뒤 전도사 고시를 보려고 했다. 하지만 사역 경력이 없어 응시조차 할 수 없었다.

“사역 증빙이 있어야 했는데 당시 저를 뽑아주는 교회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이 길이 아닌가 싶어 휴학을 선택했죠.”

휴학 이후 그는 전문대학 컴퓨터학과에 진학했다. 소프트웨어 개발 쪽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직접 만든 프로그램으로 상을 타는 등 인정을 받았고, 제법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생활은 차츰 안정돼 갔지만 마음 속에는 수련회 때 하나님과 한 약속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필리핀 단기선교여행을 다녀오게 됐고, 그곳에서 ‘컴퓨터를 통한 선교’라는 구체적인 비전을 발견했다. 돌아와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장 러시아 선교사로 자원했다.
 
“생각해보면 전문인 선교사의 길을 미리 예비하셨어요. 당시 소련이 붕괴되고 서구 문명이 물밀듯이 유입되던 러시아에 컴퓨터는 좋은 선교 도구였죠. 신학을 포기하고 컴퓨터를 전공했던 것을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이미 저를 만들어가고 계셨습니다."

러시아에서의 사역은 차질없이 진행됐지만 외로움이 문제였다. 장애 때문에 결혼은커녕 이성 교제 조차 꿈도 안꿔봤다는 그였지만, 그 또한 혈기 왕성한 이십대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40일을 금식하며 하나님께 짝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날 박 선교사는 비자 갱신을 위해 잠시 귀국한 중에 극동방송에서 하던 ‘장애인은 내 친구’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시베리아 칼바람을 녹일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그의 말에 7명의 자매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하지만 처음 6명의 자매들과는 대화가 잘 되지 않았다. 마지막 7번째가 지금의 아내 박에스더 사모였다.

“금요철야가 끝난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첫 통화를 무려 40분이나 했습니다. ‘바로 이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죠.” 만난지 3일 만에 상견례를 했고, 20일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러시아에서 첫 아이를 낳고 사역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박 선교사는 백석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땄다.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태국행을 인도하셨다.

“영하 40도(러시아)의 환경에 적응했는데, 다시 영상 40도(태국)의 더운 나라로 옮기시는 이유를 몰라 혼란스러웠죠. ‘왜’ 라는 질문이 뒤따랐지만 이미 제게는 순종하는 근육이 생겨 있었습니다.”

2002년부터 5년 동안은 태국신학교에서 컴퓨터 이론과 실기를 가르쳤다. 2006년엔 1기 사역을 마치고 미국 미시시피주 잭슨 주재 리폼드신학대학원(RTS)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수료했다.

미국에서의 안식년을 마치고 2년 만에 태국을 돌아왔을때 청천병력같은 소식이 찾아들었다. 아내 박에스더 사모가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눈이 빠질듯한 통증과 구토가 동반됐고, 정밀검사 결과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시신경과 대동맥 사이에 위치한 종양을 본 의사들이 '내 가족 같으면 수술 못한다’고 하더군요. 시신경을 건드리면 평생 앞을 볼 수 없게 될 것이고 대동맥을 건드리면 생명에 위협이 있을 거라고요.”

‘왜’ 라는 질문이 다시금 끊임없이 머리 속에 맴돌았지만 부부는 순종을 택했다. 수술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방사선 치료도 불가능한 부위라 그저 병원에서 준 약만 열심히 먹으며 하나님 뜻대로 하시기를 간구했다.

며칠 후 병원을 찾았다. 기적이 일어났다. 종양이 4분의 1로 줄어있었고 호르몬 수치도 정상에 가깝다고 했다. 박 선교사는 그때를 회상하며 고백한다. “삶 자체가 순종인 것 같아요. ‘왜’라는 질문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어요.”

박 선교사는 현재 3기 사역으로 현지인 교회인 ‘태국 선교 교회'를 시무하고 있으며, 배움을 원하는 차상위계층을 위해 한국어와 영어, 컴퓨터, 음악 등을 가르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가장 좋아한다는 그는 “삶의 긴 터널을 지나오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걸어왔지만 돌아보니 하나님은 희미하게 보이는 확증을 주셨다”고 말한다. 계속 선교를 하는 것이 가장 큰 비전이라는 박수영 선교사는 현재 슬하에 두 자녀를 두고 있으며, 선교 후원 확대와 동역자 발굴을 위해 많은 성도들이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당부했다.

▲ 박수영 선교사와 그의 아내 박에스더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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