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태화의 문화칼럼]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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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의 문화칼럼]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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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6.24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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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의 종횡무진 문화읽기 (18)

현대 사회를 일컬어 경계사회라 부르기도 한다. 경계는 야릇하면서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강화도 북쪽에는 한강 하류와 임진강이 만나고 바다와 인접한 경계선이 있다. 여기에는 플랑크톤이 항상 풍부하다고 한다. 어족이 많아 고기잡이가 언제나 만족스럽다는 얘기다. 스위스에는 독일어, 불어, 이태리어, 라틴어 등 다양한 언어가 존재한다. 통계에 의하면 스위스 청소년은 이런 이유로 한 가지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보다 언어능력이 최소 15% 높다고 한다. 경계는 여러 부분들이 함께 모여 장점들을 교환할 수 있으므로 잘 활용하면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경계는 또 다른 면이 있다. 그늘이다. 경계에 있기 때문에 항상 갈등과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는 경우다. 더 심각한 것은 이 경계를 빌미로 본질을 왜곡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북한 사이에 있는 휴전선이 경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진실게임의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은 러시아,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와 경계를 두고 갈등을 빚는다.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라, 분쟁을 조장하고 이로써 자국 이기주의를 챙기려는 속셈이다. 이는 마치 나치시대에 히틀러가 활용하던 정치적 꼼수에 비교할 수 있다. 히틀러는 권력의 정점에서 정치적 자존심을 회복하여 자국민들에게 지지를 얻으려는 저의를 가지고 경계를 적극 갈등지역으로 만들었다. 결국 경계를 침범하는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경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를 통해 행위의 진실을 파악하게 된다. 이는 역사가 강변하고 있는 사례다.

이제 경계는 교회에 대두되고 있다. 교회는 어디에 서 있는가. 교회는 천국과 지상 경계에 있다. 교회는 거룩과 세속 경계에 있다. 교회는 과거와 미래 경계에 있다. 교회는 은혜와 죄의 경계에 있다. 교회는 의인과 죄인 경계에 있다. 이처럼 교회가 경계에 있다는 것은 교회의 한계가 아니라 교회의 가능성이다. 교회는 이 경계를 긍정적으로 포용하고 활용하므로써 교회다움을 증명할 수 있으며 교회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교회가 경계에서 흔들리고 춤추는 모습을 발견한다. 교회 지도자들이 경계에서 추락하는 경우를 본다. 경계는 이런 경우 심판의 기준이다. 경계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문제는 곧 신앙의 분별력에서 출발한다. 경계에 임하여 더욱 삼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고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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