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일치운동은 20세기 교회역사에 중요한 위치 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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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일치운동은 20세기 교회역사에 중요한 위치 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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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6.02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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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일치운동
▲ 조병하 교수

오늘날 프로테스탄트교회 교파들의 분열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위한 노력은 온전히 근대교회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17세기의 재통합의 대화들과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시대 중에서 이미 교회일치를 위하여 구체적인 계획들이 발전되었고 일치를 위한 시도가 감행되었다. 19세기에 각성운동을 통하여 사회적이고 선교적인 영역에서 교파와 미족을 초월하여 결합을 위한 자극을 주었다. 19세기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선교문제로 선교영역 내에서 경쟁은 서로간의 교회의 새로운 만남에 대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무엇보다도 교회일치 운동에 대한 자극은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났던 각성운동이었다. 무디의 부흥운동에서 감화 받았던 이들이 초창기 교회일치운동의 중심에 섰었다.

1910년 에딘버러에서 제1차 세계선교회의(국제선교협의회)에서 프로테스탄트교회 진영의 공동의 선교사역이 합의 되었다. 그리고 이 회의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태동에 근본적인 자극을 주었다. 역사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그 결과는 선교단체들 뿐만 아니라 교회들도 역시 서로 가까지 지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이 시기에 교회들은 선교의 문제뿐만 아니라 신학과 윤리의 문제에도 갑작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선 두 가지 운동이 평행하여 진행되었다. 스웨덴 대감독 나탄 죄더블롬(1866-1931)의 지도 아래서 실천적인 그리스도교운동으로 ‘삶과 사역(Life and Work)’과 신앙과 교회직제를 위한 운동으로 ‘신앙과 직제(Faith and Oder)’가 그것이다. 실천적 그리스도교운동을 위한 제1차 세계회의는 1925년 스톡홀름에서 개최되었다. 물론 독일의 프로테스탄트교회 연맹의 대표들 역시 이 회의에 참가하였다. 이 운동은 무엇보다도 현대적인 삶의 사회적인 문제를 위한 도움에 관한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신앙과 직제의 제1차 세계대회는 1927년 로잔에서 열렸다. 또한 1937년 실천적 그리스도교운동의 제2차 세계대회가 옥스퍼드에서, 신앙과 직제 제2차 세계대회는 에딘버러에서 열렸다.

1948년 8월 22일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구성되었다. 총회는 “세상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앞선 두 교회일치운동은 이제 합치게 되었다. 147개의 그리스도교회의 대표들이 참석하였고 미국에서는 수많은 교회들이 종을 울려 이를 축하하였다. 예배는 찬송가 ‘온 세계 만민아 주를 찬송 할지어다’로 시작되었고, 예배는 네덜란드 개혁파교회의 목사가 인도하였고, 기도는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기도하였다. 성경은 프랑스 프로테스탄트교회 연합회장과 스웨덴교회의 총회장이 자신들의 언어로 낭독하였고, 설교는 1910년 에딘버러대회 이 후 교회일치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존 모트(1865-1955)가 행했다. 암스테르담 제1차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본부는 제네바에 두고 총무부와 상임위원회를 두기고 결정하였다. 공동의 신앙고백의 작성은 거부되었고, 사도신경도 동방교회가 콘스탄티노플신앙고백(381)을 고백하는 것을 고려하여 고백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교회협의회는 1948년 헌장에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승인하는 교회들의 공동체”라고 선언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강령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은 1960년 성 앤드류에서 있었던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 모임에서 헌장의 같은 내용을 “세계교회협의회는 성서에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그런 까닭에 공동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이 부름 받았던 바를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교회들의 공동체이다.”라고 대체하여 헌장의 토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일치를 위한 노력과 더불어 1950년 토론토협의회의 선언에 따라서 세계교회협의회는 그 자체의 특성을 “초교회”도 아니고 개체를 구성하고 있는 몸된 교회들 간에 연합협상을 수행할 과제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또한 어떤 회원교회에 대한 지도의 기능도 갖지 않고 오히려 각 가입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는 표명들이나 행위들을 받아들일 권리나 거절할 권리를 갖는다.

1961년 제3차 뉴델리 총회에서 국제선교협의회가 통합되었고 선교적인 차원이 이제까지보다 강조되었다. 그리고 동방정교회가 참석하였다. 1968년 제4차 웁살라대회에서는 사회참여를 위하여 ‘하나님의 선교’가 강조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적 통찰을 적용하려는 분위기는 세계교회협의회의 바른 방향을 잡으려는 의도와 세계복음화를 위하여 1974년 로잔대회를 갖게 하였다. 이는 1975년 제5차 세계교회협의회 나이로비대회에 영향을 끼쳤다.

교회일치운동은 20세기의 교회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 밖에도 1951년에 미국복음주의 협회와 세계복음주의협회가 조직되었다. 이는 교회가 아니라 개인과 기관을 회원으로 조직되었다. 또한 1946년에는 개혁연합노회가 그랜드 래피드에서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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