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에 참석함이 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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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에 참석함이 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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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1.2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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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돈 교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우리 고유 명절인 설날이 다가오고 있다. 가족들을 찾아보기 위해 고향으로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화를 겪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설과 추석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먼 길을, 고속도로에서 그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고행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찾아간다.

물론 이 연휴 기간을 맞이하여 외국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이들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하고, 휴가지에서 간단히 차례를 지낸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온 국민이, 더 나아가서는 온 민족이 지켜 행하는 시기이다.

명절이 되면 우리 교인들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다. 차례 상이 차려지는데 그 앞에서 절하는 문제 때문에 즐거워야할 명절에 다툼의 중심에 서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 신앙의 문제 때문에 일가친척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심한 집안에서는 왕래를 끊기도 하고, 심지어 폭력이 오고가기도 한다.

과거 교회에서는 이 제사와 차례 문제로 갈등을 겪는 이들의 간증이 자주 있었다. 집안에서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이는 명절에 차례를 지낼 때를 지나서 찾아가는데 선물 보따리를 한아름 들고 간다는 지혜를 간증하기도 했다.

유교적 이해에 의하면 돌아가신 부모님을 포함하여 조상들은 집안 가운데 함께 거한다. 그들은 죽었지만 죽음의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 큰 집에서는 사당을 지어서 아침, 저녁으로 인사를 하고 식사를 지어 올렸다. 나가고 들어올 때면 이 사당에 올라가서 조상들께 신고를 했다. 이렇게 가족 가운데 존재하는 이들은 제사와 차례가 되면 현존하여 그들과 함께 한다. 즉 살아있는 가족들의 기억 속에서 그들은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제사와 차례이다.

그래서 제사나 차례를 지낼 때면 마치 조상들이 함께 있는 것처럼 행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흠향’이라고 하는 순서일 것이다. 집안마다 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제사나 차례 중간에 조상들이 오셔서 식사를 하는 순서가 있다. 그 때에 문이나 창문을 조금 열고는 진지에 숟가락을 꼽아 놓는다. 그리고 참석자들은 돌아서 있거나 잠시 나가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조상께서 오셔서 식사를 하신다는 생각이다.

제사와 차례가 끝나면 이제 참석자들이 끝난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이것을 ‘음복’이라고 하는데 조상의 덕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통하여 참석자들은 조상과 한 상을 나누어 먹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조상들과 밥을 나누어 먹는다는 식구의 의식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참석자들, 즉 한 조상을 모시는 일가친척들이 한 상을 중심으로 가족공동체를 확인하는 식구의 의식을 갖는다.

이러한 제사나 차례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차례에 참석하는 것이 옳지 않다. 어쨌거나 그 과정을 통하여 조상들의 영혼과 교류한다는 의미를 얻기 때문이다. 물론 조상을 신으로 생각하고 제사나 차례를 잘 치러야 복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 그렇다면 좀 더 의미가 더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이러한 생각은 많이 희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의미를 생각하며 차례에 참석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차례에 참석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즉, 차례를 종교적 의미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모여서 함께 나누는 의례로 보자는 것이다. 조상을 신으로 보고, 그들이 아직 살아 있어서 함께 식사를 하고 그 자리에 찾아오신다는 의미로 볼 것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모티브로 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에 개인적으로는 동의와 함께 거부감도 함께 있다. 실제적으로 오늘날 차례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없다는 현실 인식에는 동의한다. 그래서 별 의미도 없는 가족행사에 반대하며 굳이 그렇게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런 현실적인 이해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 가르침이 선뜻 그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도록 만든다.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순교하였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생각나서라도 나는 그런 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시대가 던지는 이 질문에 우리가 한 번 진지하게 마주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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