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교회의 개혁운동에서 청교도 운동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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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교회의 개혁운동에서 청교도 운동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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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2.1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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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교회개혁과 청교도운동

▲ 조병하 교수
1509년에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1521년 7성례를 지지하는 글을 써서 교황 레오 10세에게 헌정함으로서 교황으로부터 가톨릭교회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얻었었다. 그러나 왕의 사적인 문제로 교황과 갈등관계에 빠졌다. 헨리 8세는 스페인 왕실출신 왕후 캐서린과 사이에 메리라는 딸만을 두고 있어서 왕실 계승을 명분으로 앤과 혼인하기 위하여 캐서린과의 이혼을 위한 교황청의 허락을 요구하였으나 교황청은 승인하지 않았다.

헨리 8세는 1532년 캔터베리 대주교로 토마스 크랜머(1489-1556)를 임명하여 교황청과의 단절을 위한 수순을 밟기 시작하였다. 크랜머 역시 교황권세보다 세속권세의 우위를 주장하면서 헨리를 지지하여, 1533년 캐서린과의 이혼과 앤과의 결혼을 합법화 하고 앤에게서 난 엘리자베스를 왕위 계승권자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1534년 영국의회는 잉글랜드교회에 대한 교황의 권한을 배제하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같은 해 수장령을 공포하여 영국 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선언하였다.

잉글랜드는 14세기부터 개혁의 선구자 존 위클리프와 그의 추종자 롤라드파의 개혁사상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또한 1525년경부터 루터의 사상이 소개되면서 개혁을 위한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윌리엄 틴데일(1490-1536)은 에라스무스판 헬라어 신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1520년 보름스에서, 모세오경을 1530년 안트베르프에서 출판하였다. 헨리8세를 이은 에드워드왕(1547-1553 재위)때 개혁은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크랜머는 왕의 요청으로 1549년 ‘공동기도서’를 집필하여 사용하였다. 이 당시 마르틴 뿌쳐와 페르미글리가 크랜머의 초청으로 캠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교수하고 있었다.

또한 크랜머는 1553년 니콜라스 리들리와 존 낙스 등과 함께 ‘42개 신조’를 작성하여 왕의 공인을 받았다. 그리고 이 신조는 엘리자베스여왕 치하에서 ‘39개 신조’로 개정되어 오늘까지 영국 성공회의 신앙고백으로 활용되고 있다.

1553년 에드워드 왕이 죽고 캐서린의 딸 메리가 왕위에 오르며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복원을 진행함으로 영국 내 개혁운동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박해로 인하여 300여명의 개혁자들이 처형되었고, 800여명의 개혁자들이 대륙으로 건너가 제네바, 쮜리히, 프랑크푸르트 등에 망명생활을 하였다. 1558년 메리가 사망하자 앤이 낳은 딸 엘리자베스가 왕(1559-1603)이 뒤를 이으면서 다시 여왕이 성공회의 수장이 되었고, 여왕은 캔터베리의 대주교 메튜 파거로 신앙고백을 만들게 하여 ‘39개 신조’가 완성되어 활용되어 오고 있다.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자 대륙으로 피신하였던 사람들이 귀국하였다. 이들은 개혁교회 지역에 피신하여 있었음으로 개혁교회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말씀을 따라 교회를 개혁하려고 시도하였다. 또한 교회정화운동으로 시작되었던 영국교회의 개혁운동에서 청교도 운동이 발전하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예배의식을 간소화 하였다. 또한 철저하게 말씀대로 개혁하고 삶도 개혁하여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그들을 적대자들이 ‘청교도’라고 비꼰대서 칭해져 그들의 이름이 되었다. 물론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은 청교도만의 노력은 아니었다. 다른 개혁자들이나 반 종교개혁자들도 역시 정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철저하게 계명을 따라 살았다.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일에도 철저하였다. 교육적이며 교훈적인 것을 제외하고 극장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청교도는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성공회 안에 머문 무리들, 분리주의 교회관을 갖고 일찍부터 분립한 독립교회들, 장로교처럼 가능한 영국교회 내에 머물기를 원했으나 결국 분리하게 되는 그룹들을 들 수 있다. 청교도 운동 내부에서 장로교주의를 발전시킨 사람은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이었던 토마스 카트라이트였다. 그는 사도행전을 강의하면서 잉글랜드 교회를 위한 교회 정치제도가 장로교 제도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570년 이후 장로교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정치제도임을 강조하다가 국외추방이나 거듭 투옥되었었다. 청교도들 중에 장로제도를 반대하고 로버트 브라운(1550-1633)은 1580년 노리치에 독립교회를 세웠다. 회중교회는 브라운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고, 그리고 독립교회들 중에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침례교회가 생겨났다.

침례교회 내에서 1608년 런던에서 존 스미스(1570-1612)는 네덜란드의 재세례파 메노파와 결연을 시도하였고, 선택의 교리를 가르쳤다. 헨리 제임스는 영국 내 자생적 침례교회를 대륙의 재세례파와 상관없이 형성되어 칼빈의 예정론을 따랐다. 북미의 로드아일랜드 주를 개척한 로저 윌리엄스 역시 스미스와 같은 생각으로 침례교를 세웠다. 그러나 1583년 존 휘트기프트가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면서 잉글랜드 국교회의 예배의식을 강화하여 이를 따르지 않았던 청교도들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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