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0년 총괄서에 받아들여지면서 신조의 효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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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년 총괄서에 받아들여지면서 신조의 효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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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0.3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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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주의 신대(신앙고백의 형성) I

▲ 조병하 교수
‘신조주의 시대’라는 개념은 우리 시대에 종교사회학자 에른스트 트뢸취(1865-1923)와 역사학자 오토 브룬너(1865-1923)에 의하여 각인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시대를 1555년 아욱스부르크평화조약으로부터 1648년 베스트팔레이야 평화조약까지를 일컫는다. 그리고 이 개념은 일반역사와 교회사 기술에 적용되었다.

종교개혁초기 이전에는 신앙고백의 대립에 의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신조주의 시대에 이르러서 루터교, 칼빈주의(개혁교회),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앙고백화가 일어났다. 신앙고백의 특징이 외형적으로는 대립되는 과정과 연관이 있다. 볼프강 좀머는 ‘신앙고백화와 세속화는 변증법의 관계로 서로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조시대는 결코 단지 신앙고백의 경직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곧바로 역시 하나의 놀라운 정신적 생동감과 영적인 깊이를 보였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한 ‘요한네스 칼비누스는 종교개혁시기에 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 역사는 신앙고백시대의 하나의 중요한 현상이었다.’고 말한다. 종교개혁 이후의 로마 가톨릭교회주의는 무엇보다도 트리엔트 회의와 “가톨릭 개혁”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중에서 루터교의 주요 신앙고백형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다음 회에 개혁교회와 그 밖의 주요 신앙고백들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루터교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은 1530년 아욱스부르크신앙고백에서부터 이야기 할 수 있다. 황제 칼에 의하여 소집되었던 아욱스부르크제국의회에 필립 멜란히톤이 초안하였던 “4개 도시 신앙고백서”, 쯔빙글리의 “칼 대제에게 신앙의 고려”를 제출하였다. 마르틴 루터는 정치적인 이유로 참석할 수 없었고, 코부르크요새에 있었다. 멜란히톤이 제출한 “4개 도시 신앙고백서”가 중심이 되어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신앙고백서가 완성되었다. 루터는 신앙고백에 대한 칭찬과 교황의 최고우위권과 연옥에 대한 비판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했다.

그 후 칼 대제는 요한네스 에크의 “반박문”을 가지고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반대하였다. 이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합의에 의해 멜란히톤의 “아욱스부르크신앙고백의 변증서”가 다시 제출되었다. 칼은 이것을 되돌려 보냈고, 프로테스탄트교회를 후원하는 영주들은 제국의회를 떠났고,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영주들만 남아서 보름스의 칙령의 효력을 다시 확인하였다.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은 28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1-21항은 신앙과 교리에 대한 것이었고,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논쟁은 일부만 반영되었다. 22-28항은 미사, 분잔 금지, 독신주의, 금식, 수도사의 맹세 등을 다루었다. 이 신앙고백이 1531년에 멜란히톤에 의해 책으로 출판되었고, 1540년 수정판인 ‘코페시오 아우구스타나 바리아타’가 나오고 칼비누스도 서명하게 되었었다.

다음으로, 루터교에서는 1520년에 대교리문답과 소교리문답서를 작성하였고 책으로 출간되어 사용하면서, 이것이 1580년 일치 총괄서에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신조의 효력을 갖게 되었다.
세 번째 루터교의 신앙고백은 1537년 슈말칼덴 신앙고백이다. 1536년 교황 파울루스 3세는 만투아에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1537년 2월 슈말칼덴에서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사람들이 모여 만투아 회의 참석을 거부하고, 멜란히톤의 “교황의 권위와 수장론에 대한 논문”을 승인하였다. 루터는 작센의 선제후의 요청에 따라서 회의에 의견을 문서로 제출하였다. “슈말칼덴 조항들”이었다. 1537년 회의 루터는 심한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였고, 멜란히톤은 “슈말칼덴 조항들”의 공식적인 채택을 방해하였고, 단지 신학자들만이 이에 대하여 서명하였다. 그리고 1580년 신조에 받아들여졌다. 루터는 그 조항을 셋으로 분류하였다.

1577년 회의는 튀빙겐대학의 총장이었던 야콥 안드레아에(1528-1590)가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관련된 논쟁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토르가우 책”을 작성하였다. 이를 토대로 일치의 신조가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이 일치의 신조가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끝맺음을 하고 구속력이 있는 주석이라는데 동의하였다. 성서는 유일한 규범과 표준이었고, 그것에 의하여 모든 교리와 교사들이 평가되어질 수 있다. 화체설, 희생의 미사와 평신도 분잔 거부, 뿐만 아니라 정신적-상징적 성만찬 이해도 거부하였다. 칼비누스의 예정론에 대하여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를 제시한다.

1580년 아욱스부르크신앙고백의 50주년 기념으로 일치의 총괄서가 출판되었다. 위에 언급한 모든 자료들이 통합되었다. 고대교회의 세 가지 신앙고백들(사도들의 신앙고백, 니카이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 아타나시오스 신앙고백), 아욱스부르크신앙고백과 변증서, 루터의 “슈말칼덴 항목”, 멜란히톤의 논문, 루터의 대, 소교리문답서, 일치의 신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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