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특정 장소에 매이시는 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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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특정 장소에 매이시는 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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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0.04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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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하나님의 임재와 사명의 장소

신 광야에서 만나의 기적을 체험하고 안식일 준수 훈련을 거친 이스라엘 백성은 신 광야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그들은 신 광야에서 말씀대로 살고 행하는 훈련을 받았기에 신 광야를 떠나 길을 갔다. 이 때 그들에게는 믿음이 필요했을 것이다. 신 광야에서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던 하나님이 다른 장소에서도 그들에게 만나를 주시리라 믿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면 그 장소를 절대화하기 쉽다. 그래서 그곳을 잘 떠나지 않으려 한다. 물론 하나님을 만난 장소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두려워 하란의 외삼촌 집을 향해 떠날 때 한 곳에서 하나님과 천사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그는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28:13-14)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 그는 아몬드 나무라는 평범한 뜻을 지닌 그곳의 이름 루스를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벧엘로 바꾸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채 기약 없이 고향을 떠나는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창28:15)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룰 때까지 야곱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창28:15). 이는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야곱과 관련하여 벧엘을 잊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동시에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 주신 장소인 벧엘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고향에 돌아온 야곱은 벧엘을 바로 찾지 않았다. 벧엘을 계속 기억하고 계셨던 분은 하나님이셨다.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 등을 죽인 후에 야곱이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의 보복을 두려워할 때(창 34:30)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을 기억시키신다. 형 에서의 얼굴을 피해 도망갈 때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야곱은 그곳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 결과 주변 민족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감히 야곱을 공격하지 못했다(창35:5). 그들을 두려워하던 야곱을 무서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두렵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벧엘이라는 특정 장소에 묶인 분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필요할 때에 특정 장소에서 우리를 만나주시지만 그 장소에 묶이지는 않으신다.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언제나 동행하시는 분이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하셨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바울을 만나주신 예수님은 그가 로마 감옥에 갇힐 때까지 그와 함께 동행하셨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던 예수님은 부활 후에 같은 장소에서 그에게 나타나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순종해서 평생 예수님을 따라다닌 베드로는 순교적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요 21:15-19).

하나님께서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제자들에게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26:32)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벧엘이나 갈릴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예수님의 동행을 기억나게 하는 추억과 사명의 장소일 뿐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다. 그러하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가 확보된 것처럼 보이는 신 광야를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지 신 광야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도 자신이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장소나 수단 등을 절대화하기 쉽다. 그러한 장소나 수단은 우리와 영원히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는 장치로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 장소나 수단을 기억하지 못할 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장소나 수단을 떠올리실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셨으며 앞으로도 함께 하실 것임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체험했던 장소를 넘어 그 장소로 내려오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벧엘에서도 야곱은 그가 있었던 곳에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념하는 돌기둥을 세웠지만, 돌기둥은 하늘 사다리 맨 윗 편에 서 계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게 할 때에만 의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특정 장소에 매이시는 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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