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비누스는 많은 재세례파들을 바른 믿음으로 돌려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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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비누스는 많은 재세례파들을 바른 믿음으로 돌려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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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0.0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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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제네바개혁의 시도와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칼비누스의 목회

요한네스 칼비누스가 1536년 긴 여행 끝에 제네바에 도착하여 머무른 동안 제네바의 열정적인 개혁자 윌리엄 파렐(1489-1565)의 초청을 받게 되어 8월에 성 피에르교회에서 바울 서신을 해설하는 강사로 임명되었다. 1년 후에는 칼비누스는 목사로 임명되었고, 합법적 선거와 교인들의 동의로 목사와 교사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는 간단한 신앙고백과 교회 훈련을 위한 신앙고백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당시 제네바는 만 명 가량의 시민이 살고 있었다.

제네바를 모범적인 공동체로 만들려던 그의 시도는 4개월도 지나기 전에 재세례파 쟝 스또르드에 의하여 도전을 받았고, 칼비누스가 이를 공개토론을 통하여 반박함으로써 더 이상 제네바 교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악한 변절자”였고, 파리에 살고 있었던 삐에르 까롤리 교수는 비방을 통하여, 제네바의 유지들을 움직여 칼비누스의 개혁에 오래도록 고통을 주었다. 이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혁운동 사이에 여러 번 마음을 바꾸었던 자로써 윌리암 파렐과 삐에르 비레에게도 정적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싸움은 길고 치열한 싸움으로 계속되었다. 우선 로잔과 베른 두 교회로부터 정죄를 받았다. 까롤리는 공개토론과 서찰을 통하여 여러 차례 충돌했었다.

칼비누스가 제네바에서 안정된 개혁을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던 일들은 좌절되었다. 1537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프랑스에 있는 친구들에게 우상숭배를 벗어나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보존할 것과 그리스도인들이 교황이 수장인 교회 내에서 직무를 맡아도 되는지 아니면 사임해야 하는지와 관련한 두 편지를 썼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제네바에서는 여러 차례 폭동이 일어났고, 칼비누스는 강력하고 확고하게 이를 반대하였다. 시의회의 과반 이상이 그로 인해 일어난 문제 때문에 3일 내에 도시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1538년 부활절에 칼비누스는 제네바에서 추방당하였다. 부활절 주일에 칼비누스와 파렐은 폭음, 폭식, 방종, 음란행위가 판치는 고장에서 성만찬 예배식을 거행하지 않겠다고 선포함이 그 이유였다. 추방당한 후 몇 달 동안 바젤에 머물던 칼비누스는 마르틴 뿌쳐의 초청으로 스트라스부르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의 관료들과 유지들의 허락을 받아 신앙을 이유로 프랑스로부터 도망 온 이들을 위한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베자는 칼비누스가 독일 개혁자들이 하지 못했던 교회훈련제도를 도입했고, 신학도 강의하였고, 적절한 급료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539년 사돌레투스 추기경은 3월 18일에 제네바 행정장관과 시민들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감언이설로 그들을 속였고 그곳에 개혁에 참여하였던 목사들을 중상모략 하였다. 그는 1년 전 제네바를 떠난 칼비누스의 개혁운동에 타격을 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칼비누스는 장편의 편지로 응대하였다. 9월 1일 스트라스부르에서 발송된 이 편지는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그의 글에 남아있다. 같은 해 8월 1일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기독교강요)’ 개정판에 심혈을 기울이느라고 응대가 늦었던 것 같다. 10월 18일에는 로마서 주석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칼비누스는 프랑스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성만찬에 대한 간결한 글을 썼다. 배자는 칼비누스가 당시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분열을 초래할 정도로 논쟁을 일으켰던 성만찬문제를 분명한 설명으로 수습하려고 힘을 다했고,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대해 “하나님 다음으로 감사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칼비누스는 많은 재세례파들을 바른 믿음으로 돌리는 성과를 올렸다. 그 중에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1518년 ‘그리스도교의 용사’라는 글을 헌정하였던 대수도원원장을 지냈던 파울루스 볼시우스라는 사람은 재세례파에서 돌아선 후 죽을 때까지 스트라스부르의 한 교회에서 목사로서 사역하였다.

1541년 독일 보름스와 라티스본에서 열렸던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었다. 이 회의에서 칼비누스는 그의 활약을 통하여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에게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베자는 이때부터 칼비누스가 필립 멜란히톤과 가스파르 그루키게르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신학자”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칼비누스는 그루키게르와는 성만찬에 대하여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서로 같은 견해를 갖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1540/41년 “변경되어졌던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서명하였다. 이는 필립 멜란히톤이 1530년 아욱스부르크신앙고백의 개정판을 제출한 것으로 신앙고백의 제 10항인 성만찬 조항이 개정되었다. 쮜리히는 쯔빙글리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를 중심으로 1536년 제1 스위스신앙고백을 작성하였고, 1549년 제네바와 쮜리히는 쮜리히의 일치신조를 작성하여 성만찬에 대한 일치를 이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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