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돕던 인물들 루터 떠나거나 신학입장 달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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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돕던 인물들 루터 떠나거나 신학입장 달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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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0.0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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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개혁의 소용돌이(타울러, 스타우 핏쯔, 농민전쟁, 에라스무스)

놀랍게 확산되어 가는 종교개혁의 진행은 모든 면에서 새로운 변화와 체계의 변혁을 가져왔다. 루터의 개혁이 분명해 지면서 이제까지 개혁의 길을 여는데 도움을 주었던 요한네스 타울러(1300이후-1361)의 신비주의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라고 칭할 정도로 그의 개혁을 도왔던 요한네스 폰 스타우핏쯔(1465-1524), 인문주의 대가로 그에게 지속적으로 개혁에 영향을 주었던 로테르다무스의 데지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69-1536)가 그의 곁을 떠나거나 신학입장을 달리하게 되었다.

젊은 루터에게 신비주의는 사변적 신비주의의 길을 걷게도 하였다. 하나님을 향하여 간구하는 한 영혼이 하나님과의 행복을 위한 연합 안에서, 최종적인 안식을 찾고자 세상을 뒤로하려고 시도하였고, 이생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영역으로 기어오르려고 시도하였다. 루터는 불완전하게는 1516년부터, 완전하게 발행하기는 1518년에 이루어졌던 ‘독일의 신학’에 의해 신비주의에 열광케 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타울러와 ‘독일의 신학’을 신비주의의 증언으로 읽지 아니하고 오히려 진정으로 경험되어지고 생명 있는 신학의 분명한 예로써 읽었다. 루터에게 타울러는 세상에서 믿음의 삶을 추구하는 길의 안내표지가 되었다.

스타우핏쯔는 루터 자신이 증거하는 자신의 개혁의 후원자이었다. 둘 다는 모두 스콜라신학을 교육받았고,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성서의 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들의 중심신학 주제는 인간의 죄,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를 통한 의로움(정당함) 이다. 루터는 보다 연구가이고 스타우핏쯔는 목회자이고 설교자이었다. 루터는 장인 그리고 시민출신이고 스타우핏쯔는 귀족 가문출신이었다. 루터는 그로부터 ‘오직 성서’만 읽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루터는 스타우핏쯔가 “수도원교회들을 성서를 통하여 회복시켰고, 가장 좋은 재능들을 창조하였고 그리고 신학적 연구를 위하여 헌신하였다”고 평한다. 하나님의 진로에 대하여 사색하기를 위해 필사적일 때 스타우핏쯔가 생각한 것은 ‘예정’이다. 루터가 이에 대하여 예정의 중요함을 그에게 하소연 할 때 그가 루터에게 “그리스도의 상처들 안에서 예정이 이해되어지고 발견된다”고 교훈한다.

개혁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동안 1521년 2월 9일 루터는 당시 잘쯔부르크에 있었던 스타우핏쯔에게 자신의 개혁을 도울 것을 간청하고, 교황에 대한 복종의 위험성을 경고하였음에도 루터 개혁의 후원자이었던 그는 1522년 8월 루터를 떠나 잘쯔부르크 성 베드로 베네딕투스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되어 가게 되었다. 스타우핏쯔도 ‘즐거운 교환’에 대하여 가르쳤으나 루터와 신학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즐거운 교환’은 그리스도가 성취하는 교환을 통하여 믿는 이는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다”라는 주장이다.

개혁 도상 1517년에서 1520년에 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교황교회의 단절이 일어났고, 이어지는 해 1521년에서 1525년에 그는 급진적인 개혁가 칼슈탓트와 토마스뮨쩌와 농민들로부터 단절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당시 인문주의의 정신적인 지도자 에라스무스와 루터 사이의 단절이 1524/25년에 일어났다.

에라스무스와의 단절은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자들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두 대표자들 사이의 단절은 양진영 후계자들 사이의 갈등이 오래 지속되게 만들었다. 물론 인문주의나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는 당시 사용된 용어가 아니었다. 두 운동은 공히 스콜라신학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나 헬라어 신약성서도 인문주의자들의 수고에 힘입고 있다. 인문주의는 헬라어뿐만 아니라 라틴어, 히브리어 등 고전적 언어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주었다.

한편 에라스무스는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루터 개혁에 참여하게 되면서 교황교회이든지 아니면 개혁가들에게 힘을 더하든지 선택의 귀로에 서게 되었다. 그는 루터와 근본적으로 불일치하는 많은 부분이 있어서 교황 편에 서게 되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를 조심스럽게 공격하였고 뿐만 아니라 그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였다.

에라스무스는 루터를 공격할 때 당시의 일반적인 논제들인 교황권, 공의회의 권위, 믿음, 정당함 혹은 성례전에 대한 가르침을 택하지 않고 의지의 자유로운 결정에 대한 주제를 택하였다. 그는 루터의 다른 적대자들보다 루터에 대하여 논쟁의 중심을 명쾌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사제교회의 입장에서 루터를 공격하였다. 1524년 9월 1일 루터에 대항한 첫 글 ‘의지의 자유로운 결정에 대하여: 담화나 혹은 담판’을 발표하였다. 농민전쟁을 수습해야 하였고, 당대의 대가에 가볍게 답할 수 없었던 루터는 1525년 12월에야 ‘의지의 종속결정에 대하여’를 기술함으로써 에라스무스와 결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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