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전유물이던 남북대화 '글리온회의' 이후 민간으로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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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전유물이던 남북대화 '글리온회의' 이후 민간으로 확장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3.07.1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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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정전협정 60주년, 평화를 말한다 ④인도주의와 민간교류, 또 다른 통일의 끈 (상)


<특별기획> 정전협정 60주년, 이제는 평화다

남한 내 이데올로기 갈등 벗기 ‘분단체제 종식’ 여부에 달려

지난 3월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치달았던 남북 관계. 북한의 핵전쟁 압박 속에서도 우리 정부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정부부터 계속된 남북관계 단절은 민간교류 창구마저 끊어버렸고, 남북한 상생을 위해 경제협력으로 이뤄낸 개성공단의 가동마저 중단되는 안타까운 상황에 이르렀다. 더 이상 출구가 없어보였던 지난 6월, 극적으로 북한과의 대화가능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이 역시 실무회담 대표자 ‘급’을 문제로 다시 무산되는 등 남북한의 만남은 멀고도 멀게 느껴졌다.

남북 위기 상황 속에서 다시 남북한 대화의 창구를 열어 준 것은 바로 ‘개성공단’.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16시간의 밤샘 마라톤협상 끝에 개성공단 재가동이 결정됐고 10일 후속회담이 열렸다. 개성공단 가동중단 95일 만에 일어난 일이다.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 양측이 소통할 수 있는 길은 ‘군사’와 ‘정치’를 제외한 다른 곳에 있다.
개성공단 정상화 합의 소식을 접한 한국교회연합은 즉각 성명을 내고 “경색된 남북관계에 숨통이 트이게 된 것을 무엇보다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개성공단 정상화와 아울러 남북대화를 통해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비핵화 등 항구적 평화가 정착되는 계기가 마련되길 기도한다”고 전했다.
초보적 합의였지만 어쨌든 개성공단은 남북을 잇는 교류의 ‘끈’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북 간 ‘교류’ 없이는 ‘통일’도 없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팽팽한 줄다리기, 남북대화

1950년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3년이 지난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이후 남북한은 올림픽 단일팀 구성에 대한 제안과 결렬, 이산가족 찾기 적십자회담 제안, 김일성의 연방제 통일방안 제안 등 간헐적 논의가 오갔지만 성공적인 결실을 맺지 못했다.

1972년에 이르러서야 남북적십자 첫 실무회담이 개최됐고, 1972년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며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 합의를 도출했다. 70년대 초반 박정희 대통령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통일에 대한 다양한 제안들을 발표했지만 북측의 고려연방제 주장과 남측의 상호불가침협정 요구 등이 배치되면서 대화 결렬과 재개를 반복하는 양상을 띤 채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남북 대화는 진행됐지만 1960~1970년대 한국 사회는 군사독재시기 속에서 ‘빨갱이’를 색출하는 이데올로기 갈등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결국 남한 내 이데올로기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분단체제를 서둘러 극복해야한다는 중요한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통일을 위한 논의를 정부에게만 맡기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평화통일의 물꼬를 튼 곳은 바로 기독교였다. 민간차원의 통일논의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민간통일운동의 발원지 교회협

1981년서울에서 개최된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는 ‘죄의 고백과 새로운 책임’이라는 주제를 다뤘다. 양국 교회는 공동성명을 통해 ‘NCCK에 통일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위원회나 기구를 설치할 것’을 제안, 결의했으며 양국 교회협의회가 상호협력하기로 다짐했다.

이어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 대화가 비엔나에서 열려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전체 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이 발표됐다.

공동성명은 남북한의 자주적 통일과 민족 대단결, 중립적 연방국가, 독재정부의 종식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정권은 “민간차원의 통일 논의를 허락할 수 없다”며 교회협 주최의 통일협의회를 막았고, 극도의 경계를 보였다.

한국 교회의 통일논의가 벽에 부딪히자 이번에는 해외교회들이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1984년 3월 열린 제3차 북미교회협의회에서 ‘선교 2세기를 향한 공동선교’를 주제로 다뤘으며, 공동성명에서 분단 관련국인 미국 교회가 한국 교회와 함께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공동으로 책임질 것을 결의했다.

다음달인 4월에는 제5차 한독교회협의회가 서베를린에서 열려 민족의 분단상황에 대해 공동으로 논의하자는 성명을 채택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도 나섰다. 1984년 10월WCC 국제문제위원회가 일본 도잔소에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협의회’를 개최하면서 한반도의 상황 및 교회의 입장에 대해 협의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세계 교회가 공동으로 노력할 것을 제안했다. 일명 ‘도잔소회의’로 불리는 이 회의는 한반도 평화통일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세계 교회 인사들은 동북아의 긴장완화를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가 결정적이라는 인식을 가졌고, 도잔소 선언을 통해 분단을 넘어서지 못하는 평화와 정의는 무의미하다는 통일의 원칙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또 남북통일을 위한 첫 걸음으로 남북한 교회가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남북 민간교류의 가능성이 예고된 순간이었다.

WCC와 그에 속한 세계교회의 관심을 등에 업은 한국 교회는 보다 적극적인 통일운동에 나섰다. 1985년 교회협은 정부의 반대를 뚫고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었으며, 제34회 총회에서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총회 선언문으로 채택했다. 여기에 기장과 예장 통합 등이 가세하며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교단 차원에서 지지하고 나섰다.

남북교회의 첫 만남 글리온회의

남북한 교회가 분단 이후 처음 만나는 역사적인 사건이 1986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일어났다.

1986년WCC 국제문제위원회가 주최한 제1차 글리온회의는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성서적, 신학적 근거’라는 주제로 열렸다. 이 모임에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단 5명과 교회협 대표단 6명이 초청됐다.
남북 기독교인들이 첫 만남을 가졌으며 이념과 사상을 초월해 성만찬을 함께 나누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화해를 경험했다. 만남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더욱 부추겼고, 한국교회는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하며 분단 후 처음으로 민간도 ‘통일운동’에 나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88선언’에 대해 교회협은 “한국 교회가 채택한 가장 빛나는 통일문서”라며 “이 문서의 핵심은 민족분단이야말로 냉전체제의 구조적 죄악의 결과이며 남북사회의 구조악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분단의 책임이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절대계명을 어긴 죄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는 회개의 문서이기도 했다.

88선언에 담긴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인도주의, 민중 참여’의 다섯 가지 원칙은 이후 남북공동선언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민간 통일운동의 확산을 불러왔다.

‘인도주의와 민간의 참여’는 이후 통일 운동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하나됨’의 가능성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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