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운동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청빈한 삶이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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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운동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청빈한 삶이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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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5.31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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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 교수의 풀어쓰는 이야기 교회사 (41)

중세교회의 개혁운동과 청빈운동

▲ 백석대 역사신학
로마제국의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성장은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민족에게 멸망당할 때에는 제국의 종교로 성장했었고, 제국과 그리스도교의 관계는 일치와 조화 그리고 협력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교회는 게르만의 통치영역 안에서 새로운 사회적 상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오래도록 게르만 인들은 피정복민의 종교를 자신들의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지 않거나 깊은 영향을 받지 않고는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게르만 인들이 그리스도교화 되어가면서 귀족 영주들은 스스로 교회를 세우고 성직자들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영주들은 교회와 교회에서 사역하는 자들을 마치 자기 소유처럼 다루었다. 그러면서도 유기적 관계 안에서 교회는 중세 초기에 이미 대영주가 되었으며, 사회의 장원구조에 적응하였다. 교회는 귀족교회가 되었고, 귀족들은 교회의 높은 지위인 감독직들을 차지하였다. 칼 대제(768-814)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도 관여하였다.

793년 마인 강가의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성상숭배 반대를 결정하였고, 451년 칼케돈의 두 본성의 가르침에서 다시 출발하도록 하였다. 809년 아헨회의에서 칼 대제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는 “필리오크붸 = 그리고 아들로부터”의 논쟁에서 이와 같은 주장이 신앙고백에 포함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역사 속에서 지속되었던 황제와 교황사이의 서임권에 대한 갈등은 클루니수도원의 개혁운동으로 근본적인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910년에 부르군트에 아크부타니아의 공작 빌헬름에 의하여 세워졌던 클루니수도원은 설립 때부터 다른 수도원들을 개혁하는데 영향을 끼쳤으며, 클루니수도원이 오도 수도원장(927-942) 아래서 개혁운동은 남프랑스와 이탈리아지역의 수도원들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수도사들의 개혁의지는 일반 사제들에게도 전달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수도원 개혁과 규칙의 새로운 제정이 목표이었던 개혁의 목표가 교회의 개혁과 잊어버린 고대 교회법의 새로운 제정과 성직자의 엄격한 규율의 회복에 맞추어졌다.

개혁운동은 성직 매매에 대항하였으며, 니콜라이 주의에 대항하였다. 성직매매는 사제의 서품을 파는 행위(행 8:18-24)에서 출발하여, 후에는 교회의 직위를 돈을 받고 넘겨주는 행위로 이해하게 되었으며, 힐데브란트 시대에는 평신도 서임까지 포함하여 성직매매로 이해하게 되었다.

니콜라이주의는 성직자의 결혼생활이나 축첩생활을 의미하였다. 이는 11세기에 매우 흔한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지역에서 그러했다. 교회의 개혁은 독일에도 영향을 끼쳐 경건왕 하인리히 3세(1039-1056)에 의해 이어졌다. 그는 1046년 수트리회의와 로마회의에서 성직매매에 빠졌던 동시대 교황 세 명을 하야시켰다.

하인리히 3세가 세운 교황 중에 레오 9세(1048-1054) 아래에서 개혁은 전 교회에 미쳤고, 정기적으로 회의를 개최하여 성직매매나 성직자의 혼인을 심판하였다. 교황 자신이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개혁을 이룰 뿐만 아니라 추기경 모임을 위한 기초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선발된 두 사람이 계속되는 교황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뒤에 실바 칸디다의 추기경이 된 수도사 훔베르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된 클루니 수도사 힐데브란트가 그들이다. 개혁의 결과로 제2차 라테란회의(1139)에서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결혼이 금지되었다.

12세기에 이르러서 부와 세속권세를 주도하고 있었던 교황교회에 반대하는 청빈운동이 일어났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청빈한 삶이 이 운동의 뿌리였으며, 또한 세속화된 교회를 비판하는 척도가 되었다. 카타리파와 발데스(왈도)파의 청빈운동에 대한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여기서는 훗날 마르틴 루터의 개혁운동의 성공을 도왔던 청빈운동에 대하여 소개한다. 시토 수도회원장 피오르의 요아힘(1135-1202)은 중세의 청빈운동에 천년왕국 사상을 결합하였다. 계시록 20장을 해석하여 천년왕국이 세상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요아힘의 계산법은 역사를 삼위일체-도식에 의존했고 이에 따라 그는 1260년경에 하나의 시대전환이 일어나 성령과 신령한 교회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보았다. 요아힘의 사상은 프란키스쿠스파의 가장 저명한 성서학자 중 하나인 페트루스 요한네스 올리비(-1298)에 의하여 이어졌다. 이들의 천년왕국사상은 오랜 동안 영향을 끼쳤고, 1326년 교황 요한네스 22세에 의하여 정죄되었다.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던 천년왕국론자들은 루터를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점의 예언자로, 성령과 평화 시대의 ‘새로운 시대’의 옹호자로서 받아들이고 지지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천년왕국론자도 아니었고 천년 왕국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럼으로 이들은 후에 농민운동의 지도자였던 토마스 뮌쩌를 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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