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의 붕괴 속 교회가 국가 상속자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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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붕괴 속 교회가 국가 상속자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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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4.0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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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 교수의 풀어쓰는 이야기 교회사 (33)

                     게르만민족에 의한 서로마지역의 재편과 교회의 역할

▲ 백석대 역사신학
476년 서로마 황제가 폐위된 후에 게르만 민족은 이전의 서로마제국 영토 내부로 퍼져나갔다. 정치 질서가 새롭게 세워지고, 지중해 중심이었던 역사의 무대가 알프스산맥 북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중에서 게르만민족의 새로운 인간, 종교, 정신, 문화기반을 통하여 역사적인 변화를 가져오면서 중세의 역사가 열렸다.

교회는 로마제국의 붕괴 속에서 여러 영역에서 국가의 상속자로 등장하였다. 또한 교회는 고대 문화를 여러 새로운 민족들에게 전해주는 매체가 되었다. 변혁의 시대 속에서 교회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증대되었다.

게르만의 모든 민족들이 그리스도교로 집단적으로 개종하면서 강제로 세례를 받았었기 때문에 실제의 선교사역은 대개 세례를 실행한 후에 시작하였다. 게르만 시기의 교회는 라틴적인 기구였기 때문에 교회의 공식적인 언어인 라틴어는 문화적이고 영적인 통일성을 이루었다. 또한 수도원은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게르만민족들은 그들의 삶의 양식을 변화 받지 않고는 그리고 깊은 영향을 받지 않고는 정복민의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르만민족에게 점차 증가하는 가톨릭교회의 가치는 498년 성탄절에 라임스에서 프랑크 왕 클로드비히가 세례를 받음으로 입증되었다. 알레마니아인들과의 전쟁 중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뚜르의 그레고리우스의 글 ‘프랑스역사’(590년경)에서 클로드비히가 세례를 312년 도시 로마로 들어가는 밀비우스 다리 앞에서 일어났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회심에 견주게 한다.

4세기 이래로 영국의 섬에서 독자적으로 발전되었던 가톨릭교회는 유럽대륙의 게르만인들에게 독자적으로 선교를 하였다. 7세기에 이르러 앵글로 색슨족의 대륙선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에 의하여 그 동기가 첨가되었다. 그리고 8세기 초에 이르러 대륙에서 교회의 내적인 경건과 조직력의 증대는 선교사 빈프리드 보니파티우스(672-754)에 의하여 일어났다.

앵글로 색슨의 수도사 보니파티우스는 716년부터 대륙에 선교한 일로 선교와 교회의 조직자로 알려졌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에게서 게르만선교의 사명을 받았고, 두 번째 로마여행 때에 교황에게 복종맹세를 하였다. 그리고 723-732에 헷센과 튀링겐에서 교회의 조직가로 활동하였다. 732년 세 번째 로마방문에서 교황으로부터 대주교직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이제 주교좌를 설립하거나 다시 구성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그가 754년 프리젠 선교 중에 타살될 때까지 여러 주교좌들을 설립하였다.

대륙에서는 711년 이슬람교도들에 의하여 점령당했던 스페인지역을 732년에 완전히 회복하면서 7세기 이후에 카롤링왕조가 프랑크 왕국에서 정치세력을 잡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이제 프랑크왕국 내에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751년 피핀이 프랑크왕에 올랐고, 754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와 퀴에르지의 협정을 맺게 되었다. 협정의 주요내용은 ‘교황이 피핀을 로마제국의 수호자로 인정’하였고, 그리고 ‘교황은 제한된 이탈리아를 소유하게 되고 주인이 되었다.’ 소위 피핀의 증여와 더불어 교회국가의 근거가 마련되었다. 또한 ‘왕은 특별한 왕의 임직으로 교황의 기름부음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계약은 이어지는 중세 전체역사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

교황은 세속권세로부터 교회국가의 수장으로써 독립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교황청문서 소위 ‘콘스탄티누스의 증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당시의 교황에게 전체 서로마제국에 해당되는 교회의 여러 가지 권위들과 특권들을 수여하였고 이를 통하여 교황의 세속통치권이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서는 인문주의 시대에 이르러 위조된 문서였음이 밝혀졌다.

칼 대제(768-814)는 프랑크왕국을 유럽의 대제국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큰 통치영역을 확보하였다. 통치영역의 확장과 피정복 민족의 선교는 같은 목적으로 행하였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가진 신정 통치의 왕이고, 교회의 보호자요 지도자라고 생각하였다. 게르만민족 중에 가장 오래도록 독자성을 갖고 그리스도교화하는 것을 잘 방어했던 자들인 작센을 무력으로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이 시대에 교회와 문화 정신적 삶의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또한 칼 대제는 성상숭배논쟁과 필리오크베논쟁을 이끌었다.

843년 베르덩조약에 의하여 통일되었던 제국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이라는 나라로 나뉘었다. 그리고 오토대제(936-973) 아래서 동프랑크왕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중앙권력이 세워졌다. 동프랑크 왕국 안에서 오토대제 역시 침략과 선교를 같이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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