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수비(陶土水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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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수비(陶土水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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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3.0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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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목사 (동네작은교회)

예전에 도공들이 도자기를 빚는 과정 중에서 첫 번째에 해당되는 과정이 바로 도토수비였다고 한다. 한자 말 그대로 풀어본다면 도자기에 쓸 흙을 물에 풀어서 위로 떠오르는 것들을 걸러 내는 작업을 말한다.

고려청자나 이조백자와 같이 귀한 그릇을 만들 때 도공들은 아무 흙이나 사용하지를 않는다. 좋은 흙이 나오는 곳에서 흙을 모아 물에 풀어서 위로 떠오르는 고운 흙을 조심스레 모아서 그 흙으로 정성을 다해 빚어 그릇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빛을 내고 사람의 마음까지 감동 시키는 그릇 한점도 쉽게 만들어지는 법이 없다. 재료부터 정성을 다해 준비하는 도공의 수고는 그래서 더욱 값지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도토수비의 과정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감동은 다른데 있다. 도공의 땀과 수고로 수행된 그 흙은 숙성의 과정을 또다시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숙성의 과정은 무려 40년이 필요하다. 고려청자와 이조백자의 영롱한 빛깔은 도토수비로 얻어진 흙을 40년간 숙성시키고 나서야 반죽을 하고 빚어 구워질 때 우리 눈에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릇 한 점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다음세대를 위해 40년 전 미리 도토수비의 땀을 흘린 스승과 선배들의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흙은 40년 전 스승이 나를 위해 준비한 흙이고 또 내가 준비하는 이 흙은 40년 후 내 제자와 후배들이 써야 할 흙인 것이다. 그래서 청자와 백자의 아름다움은 이 대를 이어가는 도공들의 마음과 배려, 다음세대를 위한 헌신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목회는 늘 과거에 흘린 땀의 열매를 따먹는 현장이다. 신앙의 스승들과 선배들이 남겨준 새벽을 깨우고 밤을 지새우는 기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산간오지에 가서 교회를 세우는 개척정신,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부르심이 감격스러워 세계 곳곳으로 달려간 선교, 내 집, 내 방 한 칸보다 예배당을 먼저 짓겠다고 드려진 헌금… 그 헌신과 순교적 희생으로 오늘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목회의 그릇들을 빚어내고 있다.

그리고 목양의 그릇들을 빚어내며 우리 또한 다음세대를 위한, 내일의 후배 사역자들을 위한 도토수비의 재료들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40년 전 선배들은 우리에게 산기도, 철야예배, 제자훈련, 대학생 선교 등 도토수비로 곱게 걸러낸 재료들을 숙성해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면 우리는 오늘 어떤 재료들을 준비하고 어떤 흙을 남겨 두고 있는가 묻게 된다.

다양한 목회전략과 방법론, 이러저러한 예배형식의 계발, 전도 방법의 다양화 등 오늘 우리시대가 애쓰고 힘쓰는 목회적 기법과 접근이 있다. 그것들이 과연 40년 후 믿음의 자녀들과 후배들과 다음세대에게 소중하게 전달될 도토수비의 결과물이 될지 깊이 돌아보게 된다.

어느 날 병원 심방을 갔다가 화장실 벽에 붙은 글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사는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이다." 목회는 오랜 시간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숙성되어 가는 과정이다. 어제의 지난한 수고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고 이 오늘은 어제를 산 사람들이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물려주고 남겨준 것들을 누리고 사는 오늘이다. 오늘 우리 목회의 현장이 아무리 힘들고 도망가고 싶고 외면하고 싶더라도 어제의 선배들이 피와 땀을 흘려 모아두고 간 그 값진 흙으로 그릇을 빚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 있다.

세대를 이어가며 명품의 반열에 오르던 고려청자와 이조백자가 끊어졌던 적이 있다. 왜 그럴까? 이유는 어느 시대, 어느 도공들이 다음세대를 위한 도토수비와 숙성의 지난한 과정을 그만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마찬가지다. 내가 목회하는 현장, 내가 사역하는 시대만 부흥하면 그만이 아니다. 40년 후에도 지속적으로 신앙의 후배들이 가져가 쓸 수 있는 목양적 토양을 준비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어느 날 영성의 대가 끊어지는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재료가 많이 남았다고, 오늘의 열매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내일의 흙과 재료를 위한 도토수비의 수고를 마다하면 내일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 우리자녀들의 책임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이 져야할 일이다.

시대마다의 작품이 있고 열매가 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작은 씨앗이 뿌려질 때 가능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와 열매로 자주 비유되었다. 씨와 열매 사이에는 40년이라는 도토수비의 과정이 없이는 연결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지난한 수고와 일상의 작은 반복들이 오늘 우리가 살아내야 할 목양의 현장이고 시간들이다. 우리 모두가 팔을 걷어붙이고 흙을 퍼 담고 물을 붓고 휘저어 고운 흙은 거두어들이는 이 수고가 없이는 미래의 어느 때 하나님은 더 이상 부어주실 포도주를 멈추실지도 모른다. 새 가죽부대가 없는데 어찌 새 포도주를 담아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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