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으로 그리스도교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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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으로 그리스도교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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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8.2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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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 교수의 풀어쓰는 이야기 교회사 - (5)

                              예루살렘공동체와 그리스도교의 확산

▲ 백석대 역사신학
예루살렘 공동체는 그리스도교의 기원이 된 공동체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낸 후 부활하신 예수께서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사도들에게 보이셨고, “하나님 나라 일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명령하셨다.(행 1:3-4)
 
말씀에 따라 사도들은 예수께서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 다락방으로 돌아와 11명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120여 문도들이 모여 기도하였다.(1:12-15) 그리고 약속대로 오순절날 성령이 모인 무리들에게 임하심으로 예루살렘에 그리스도교 원시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해는 역사가들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본 글에서는 30년으로 소개하겠다. 이렇게 계산하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날을 같은 해 4월 7일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그리스도)이셨고, 메시아이신 자신을 설교하셨으며, 백성들에게 참회를 권하셨다.(마 1:17; 막 1:15)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날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설교하였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주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그리고 마음에 찔려하는 무리들에게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2:38)고 설교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원시공동체 메시지의 핵심을 본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종말론적인 신앙공동체 이었다. 성령강림을 체험한 무리들은 ‘거룩한 처소’ 곧 ‘예루살렘 성전 위로 구름타고 오실 인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로 삼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고(행 2:41),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로 말씀을 듣고 믿는 이들이 “남자의 수가 오천명”이었다고 증거한다.(행 4:4)

예루살렘공동체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디아스포라에서 절기를 지키려 올라왔다가 성령을 받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헬레니스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제하는 일로 갈등이 있어서 공동체 안에서 헬레니스트들이 조직적으로 단결했음에도 재림을 고대하는 종말론적인 신앙에는 변화가 없었다. 헬레니스트들의 수장인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행 7:54-60)로 일어났던 박해는 오히려 파루시아(그리스도의 재림)의 기다림을 강화하였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시작되어 3-4년쯤 되었을 때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헬레니스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내어쫓기게 되었다. 헬레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 이외지역 곧 자유롭게 그들을 받아들여주는 디아스포라에서 우선 회당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선교는 키프러스와 안디옥(행 11:19-26)과 로마(롬 1:7) 등의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확산되었다.

안디옥공동체가 점차 이교도 헬라인들에게 알려졌고 열정적인 선교중심지가 되었을 때에도 예루살렘공동체의 우위는 약화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예루살렘공동체가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핵심공동체라는 사실을 더욱 인식하였다. 그리고 안디옥공동체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에서 발생한 문제의 해결을 예루살렘공동체에 청원하였다.(사도회의, 약 48/49년 경. 갈 2장; 행 15장).

그리고 이 회의에서 율법과 할례를 행하는 것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공동체가 이방인들에게는 안디옥공동체가 선교 경지를 담당하도록 정리하였다.

예루살렘공동체는 유대전쟁(66-73년)으로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의 마지막 민중봉기(132-135)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발을 드려놓지 못하도록 금지됨으로 상실되었다.

예루살렘공동체의 특성은 “애찬공동체”와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미래적 식탁 동료들의 무리”로써 나타난다. 애찬은 유월절 만찬에서 이어졌고, 2세기 초까지 성만찬과 함께 실시되었다.

그러나 첨차 애찬의 요소는 사라지고 예배식으로써 성만찬만이 분명해졌다. 예루살렘공동체는 오래도록 유대교의 태에서 머물렀다. 솔로몬의 행각에서 모였고, 기도를 위하여 하루에 세 차례 성전에 올라갔다.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는 일이 이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데반의 순교 후에 헬레니스트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후에도 44년 사도 야고보가 순교할 만큼 지속되는 갈등은 있었으나 유대교와 같이 할 수 있었다. 70년 유대전쟁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도주하여 요단강 인근 펠라로 도주 할 때도 예루살렘 공동체는 같이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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