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새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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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새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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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7.25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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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기 목사 (예수로교회)

내 목회인생에 은인이 한 분이 계신다. 늦깎이 목회를 시작한 필자에게 장학금까지 주선하며 교단에 문호를 열어준 분이다. 오늘이 있기 까지 그가 일생동안 쏟아 부은 땀과 눈물의 헌신은 이미 한국교계에서 주지하는 바이다. 근간 단편적인 언론 보도만으로 본인 뿐 아니라 교단의 위상이나 도덕성을 폄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전임 이용훈 대법원장은 지난번 그의 퇴임사에서 “재판은 기본적으로 과거의 사실을 판단의 대상으로 삼지만, 그 판단은 재판 당사자의 장래뿐만 아니라 주변, 나아가 우리 사회와 국가의 미래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라고 지적한바 있다.

법원의 상징은 ‘디케(Dike)의 저울'이다. 오늘도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린 채 오른 손에는 양팔 저울을, 왼손에는 법전을 들고 서 있다. 억울한 일이 없도록 이번 사건을 다루는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며 사건의 추이(推移)를 예의주시하고 눈여겨본다.

성경에 자고새라는 새가 나온다.(렘17:11) 메추라기(partridge)로 번역된 이 새는 자신이 낳지 않은 알을 자기 알로 여기고 새끼를 부화시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뻐꾸기가 몰래 자고새 둥지에 알을 낳고 사라지면 자고새는 그것도 모른 채 20일 동안 알을 품고 부화시켜 지극정성으로 새끼를 부양한다. 뻐꾸기는 자라나서 자기가 자고새가 아닌 것을 알 때가 되면 결국 미련 없이 어미 둥지를 매정하게 떠나 버리고 만다. 뻐꾸기의 배은망덕에 자고새는 허망무실 할 뿐이다.

루소는 그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인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어디서나 인간은 사슬에 묶여 있다.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반문한다. 묶임과 매임으로부터의 자유는 비움이고 내려놓음이다. 욕심에 묶이면 사명이 야망으로 변질되고, 재물에 매이면 소명이 욕망으로 변질된다.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여량 폭포에 놀러 갔다가, 물고기보다 수영을 더 잘하는 기인(奇人)을 만났다. 공자가 대체 무슨 도를 터득했기에 그렇게 수영을 잘하는가라고 묻자, 기인은 “도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도야. 난 그저 물길을 따를 뿐이다”고 면박을 주었다. 일상의 남루함을 견디는 근본적인 힘은 지루한 일상의 파도에 몸을 맡기는 것, 그 출렁임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평생을 헤엄치면서도 결코 익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수영법은 거스름이 없는 말씀과의 유영(遊泳)이다.

바다에 바람이 없으면 배가 안 움직인다. 세파와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영혼의 닻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물이 반이 남았다는 현실을 직시하되, 반 밖에 안 남았다며 낙심할 게 아니라, 반이나 남았다고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의 불행은 ‘목마름’이 아니라, ‘메마름’이다. 복음에 목마름이요, 감사에 메마름이다. 복음에 목마름은 마귀가 노리는 틈이고 감사에 메마름은 마귀의 올무가 된다. 감사에 메마른 심령은 남을 찌르는 가시를 돋아낸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말대로,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다.

사도 바울은 감옥이라는 한지에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면서도 그의 옥중서신을 살펴보면 감사라는 단어가 무려 46번이나 반복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내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와 행복한 결실을 생각하며 비움과 나눔과 사귐의 조화를 생각해본다. 어려움과 기쁨을 함께 했던 이들이 등을 돌리고 떠났다고 울분을 토하고 슬퍼하지는 않았는가를 생각해본다.

아픔과 어려움 속에서도 참고 힘들게 일구어 놓았던 많은 일들에 대해 평가받고 인정받지 못했던 것들을 애통해 하지는 않았던가를 생각해본다. 탁란(托卵)을 품고, 제 자식 해한 남의 새끼를 지극 정성으로 먹이는, 어리석어도 어리석다는 걸 모르는 그래서 어리석지 않은 자고새의 눈물을 그대는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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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현 2019-10-25 03:06:48
지금 삶에 깨닭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