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진정한 ‘쉼’ 얻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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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진정한 ‘쉼’ 얻어볼까?
  • 이현주, 김동근 기자
  • 승인 2012.07.1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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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지에 가서 찾아보는 ‘기독교문화유적지’

▲ 산이 좋다면, 산으로. 바다가 좋다면 바다로 떠나보자!
폭염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휴가. 무더위를 이기는 ‘쉼’을 찾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뭔가 기억에 남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휴가지에 대한 정보를 미리미리 알아두는 것이 필수다. 산이 좋다면 산으로 바다가 좋다면 바다로 떠나보자. 그러나 그 곳에 남겨진 한국 기독교의 역사도 함께 챙겨가자.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섬 증도에선 섬 전체를 복음화시킨 문준경 전도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지리산에 올라 낯선 한국 땅에서 지친 몸을 뉘었을 선교사들을 만나보자. 엑스포로 들썩이는 여수라면 이 시대가 가장 그리워하는 손양원 목사를 만나 신앙의 길을 물어보자. 모르고 지나쳤을 그 곳, 기독교문화유적지. 휴가지 곳곳에 숨어 있는 기독교문화유적을 통해 신앙 선배들이 남긴 가르침을 새겨보면 어떨까.

* 산이 좋다면 지리산으로 Go Go!
숲이 우거진 산에 오르면 등을 흠뻑 적신 땀과 함께 머릿속을 꽉 채웠던 고민도 함께 사라진다. 시인 도종환은 산에서의 하루는 ‘허물’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시 ‘산경’은 산을 오른 이의 마음을 말없이 위로하는 산의 묵묵함을 담고 있다. 시인 최진연은 산을 ‘하나님의 병원’이라 칭했다. 아픈 곳을 싸매주는 산. 그래서 산에 빠진 사람들은 늘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산경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 노고단 외국인선교사수양관
산중의 명산이라 불리는 ‘지리산’. 등산 애호가라면 한번쯤 도전하고픈 지리산 종주. 올해도 같은 꿈을 꾸는 이들이 있다면 그곳에서 고마운 이를 만나라 전하고 싶다. 지리산 3대 봉우리 중 하나인 ‘노고단’은 선교사들의 휴양지였다. 선교사들이 찾았던 조선은 낯선 곳이었고 또 아직 불결한 곳이었다. 1892년부터 1920년까지 불과 30년 동안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와 가족 34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더운 여름 수인성질병이 원인이었다. 아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더운 여름을 피할 곳이 필요했다.

선교사들은 노고단 일대를 임대해 교회를 짓고 30여 채의 집을 지었다. 넓게 펼쳐진 고원에 아름답게 핀 야생화는 선교사들의 마음을 달래기 충분했다. 그 소박한 휴식은 6.25전쟁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노고단의 시설이 파괴됐고 선교사들은 왕시루봉으로 장소를 옮겨 나무집과 토담집을 지었다. 기독교 선교 역사적 가치 뿐 아니라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지리산 선교 유적지. 빨치산들이 숨어 지내며 격전을 벌인 이곳은 신앙교육뿐 아니라 이념교육의 가치도 안고 있다. 2박 3일의 종주코스를 노고단에서 시작한다면 가장 먼저 폐허가 된 선교사들의 예배당과 수양관을 통해 100년 전 선교사의 땀과 수고를 기억하는 것이 어떨까.

단, 왕시루봉은 법정금지구역으로 보호받고 있어 등반이 불가능하다.

* 자전거로 돌아보는 강경 문화유적

▲ 강경 북옥감리교회
근대문화유산의 보고 ‘강경’. 바다와는 조금 동떨어진 내륙이지만 자전거 하이킹을 계획하고 있다면 강경 문화유적을 둘러보는 것으로도 훌륭한 휴가가 될 수 있다. 강경역에서 시작해 2시간 남짓 둘러보는 문화유적은 근대 한국사를 지탱한 민족정신을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1924년. 여교사 김복희와 57명의 학생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했다.

“신사참배는 무리한 미신이며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니 절대 절하지 않을 것이다.”

최초의 신사참배 거부사건으로 알려진 강경교회에는 신사참배거부 선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강경에는 침례교 최초의 예배당인 강경침례교회가 남아 있다. 향토문화유적 제38호로 지정된 강경침례교회 첫 예배지는 옥녀봉로 73번 길에 위치해 있다.

1896년 아울링 선교사 일행이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 성도인 지병석 씨 집에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역사의 시작이다. 강경침례교회 첫 예배지 인근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북옥감리교회는 한옥 건물로 아직 그 모양이 보존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초기 예배당 형식을 알 수 있는 북옥감리교회는 남녀가 따로 출입하는 문을 만들어 놓은 ‘칸막고교회’ 형식을 띠고 있다.

근대 문화유산 벨트 조성을 위해 노력중인 강경은 지역 최초의 사립학교와 일제강점기 유형문화재인 강경화교학교, 노동조합, 한옥교회, 첫 신사참배 거부 유적 등 다양한 근대 문화유산을 소유하고 있다. 강경읍 관계자는 “지나가는 길에 들러 성지순례를 하는 관광객들이 많다”며 “금강 둔치를 따라 걸으며 기독교 역사를 둘러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여수 밤바다가 손짓한다
엑스포가 한창인 ‘여수’. 지금은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여수는 아주 작은 바닷가 시골마을이었다. 이 곳에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를 만날 수 있다.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KTX를 타고 세 시간이면 도착하는 그 곳에 손양원 목사가 있다.

미국의 포사이드 선교사가 길가에 버려진 나환자를 데려다 치료하기 위해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나병원 ‘애양원’. 또 그 뒤를 이어 순교하는 날까지 그들을 위해 일했던 손양원 목사. 여수순천사건을 통해 두 아들을 잃은 손 목사는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원수의 사형을 반대하고 그를 용서했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사랑했다.

▲ 여수 애양원교회
애양원에서는 나환자의 상처에서 나오는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 뱉는 등 낮은 자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진정한 주님의 종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감옥에 갇혔어도 절대로 그 절개를 굽히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했다. 얼마 안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을 권유하는 성도들을 배웅하고 애양원에 남아 나환자를 끝까지 돌본 손 목사. 그는 그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원자탄’이었다.
 

여수엑스포 행사장의 오동도 공영주차장에서는 여수엑스포 기간 동안 한 시간 간격으로 ‘손양원 목사 기념공원’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다. 버스를 타고 30여 분 달리면 손 목사의 기념관, 애양원, 애양원 교회, 삼 부자의 묘지 등 손 목사의 흔적을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다. 더불어 여수의 교회들이 연합해 ‘처치 스테이’라는 이름으로 관광객들의 숙박을 해결하고 있어 알찬 휴가를 즐길 수 있다.

화려한 엑스포와 푸른 바다에 가슴이 뚫렸다면 손양원 목사를 찾아 그 뚫린 마음을 사랑으로 메워보자.해상도시 여수 주변에는 방죽포해수욕장, 만성리해수욕장, 안도해수욕장 등 해수욕장이 즐비하다. 엑스포를 앞두고 여수시는 숙박시설 확충을 위해 봉황산 휴양림 ‘숲속의 집’도 마련했다. 휴양림에서는 야영과 삼림욕도 즐길 수 있어 많은 관광객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 천혜의 자연 증도, 믿음의 여인 문준경
▲ 증도 증동리교회
전남 신안군의 작은 섬까지 영향을 미친 한국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고 특히 교회를 탄압했다. 약 6개의 교회를 개척한 ‘섬 선교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평소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외치며 손수 수의를 준비해 관까지 짜놓고 복음을 전하던 그녀는 증동리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당시 공산군은 문 전도사의 교회도 어김없이 탄압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그녀는 자신이 딸처럼 아끼던 백정희 전도사와 양도천 전도사에게 피신을 권유했다.

두 전도사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며 피신을 사양했지만, “자신은 남아 이 교회의 성도들을 섬겨야하지만 두 사람은 살아서 많은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문 전도사의 설득으로 두 사람은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두 전도사가 배를 타고 떠나려는 찰나 곤봉과 죽창을 들고 달려든 공산군은 두 사람을 모래사장에 눕히고 때리고 짓밟아 두 사람의 피난은 실패로 돌아갔다.

얼마 후 국군이 목포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돌자 공산군은 후퇴하며 10월 4일 밤 비밀예배를 드리던 문 전도사를 비롯한 신자들을 백사장으로 끌어냈다. 죽음 앞에 선 문 전도사는 당황한 기색 없이 “나는 죽여도 좋지만 우리 성도들은 살려달라”며 자신보다 성도들을 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공산군들은 곤봉과 죽창을 휘두르며 문 전도사를 고문했고, 마침내 총알은 그녀의 가슴에 박혀 10월 5일 새벽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죽는 순간에도 “하나님 죄 많은 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고 고백한 그녀는 증도의 주민 90%가 하나님을 믿게 한 하나의 ‘밀알’이었다.

문 전도사를 만나려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함평J.C로 나와 무안광주고속도로를 달려 북무안I.C방향으로 가면 된다. 이어 지도읍과 사옥도를 지나 증도대교를 지나면 천상의 섬 ‘증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증도입구에서 증동리교회까지는 10여 분이면 도착하고, 근방에서 문 전도사 시절의 교회 터,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그녀의 순교 현장과 추모비도 둘러볼 수 있다.

새하얀 백사장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순교한 문준경 전도사를 만나려면 증도로 떠나보자. 증도 주변에는 우전해수욕장도 위치해 많은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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