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권칼럼] 기독교 미술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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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권칼럼] 기독교 미술의 역할
  • 허진권
  • 승인 2012.03.0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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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권의 기독교 미술 간파하기(2)

우리 나라사람들은 옛 부터 미적인 안목이 매우 높았다. 복식, 생활 용품, 가구나 공예품은 물론 가리개나 병풍에 그려진 예술적인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 수준도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50대 이상이면 가족사진 몇 장이라도 액자에 넣어 걸어놓고 벽을 장식하였었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이런 문화 수준답게 수 삼년 전부터 미술관이나 화랑에 좋은 작품이 전시되면 줄을 서서 입장권을 사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그리고 외국의 일반적인 관광지가 아닌 미술관에서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단체로 관람을 하는 모습을 보기도 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사람들은 음악이나 춤뿐만 아니라 시각 예술에 대한 욕구와 수준도 매우 높음을 잘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아직도 우리나라의 수많은 교회들이 미술에 대한 이러한 성도들의 욕구와 수준을 만족시키기에는 매우 미흡한 부분이 많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극히 상업적인 인테리어 외에는 미술에 대한 중요성이나 관심을 나눌 겨를도 없었을 것 이다. 이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는 찬양 이지 미술이 할 역할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상 파괴라는 역사처럼 은연중 배척 아닌 배척을 받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우리나라도 오래 전부터 아파트는 물론이고 대형 건물을 준공할 때 그 건물의 색채설계와 같은 조형적인 지표를 평가하고 있으며 법령으로 설치하는 조형물조차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더욱더 주변 환경과 조화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흔히 보듯 주목성을 강조한 자극적인 색채나 필요이상으로 크고 딱딱한 간판글씨체는 1960년대나 70년대 초반 초등학교나 중학교 미술시간에 잘못 들은 지극히 상식적인 이론에 근거한 결과물들이다. 이는 주변과 대비되어 주목성은 강한 반면 배타적일 때, 즉 다가가고 싶어도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게 할 때에 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는 눈길을 잡아끄는 데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그 환경과 친숙해지면서 오랫동안 생활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좋은 음악은 몰라도 소음에는 즉시 거부 반응을 보인다. 즉 신앙심이 깊은 음치가 찬양대에 서서 열창을 한다 하자, 이때 음정 박자가 틀려 찬양을 망치고 있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감각기관 임에도 시각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부조화된 환경이나 수준 낮은 작품을 대하면 왠지 모르게 불편하고 산만하며 지루함을 잠시 느낄 뿐 곧바로 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적응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끝내 알지 못한다. 결국 이유도 모른 채 지루하고 산만하며 불편함을 간직한 채 지내게 된다.

하여 이제 우리나라의 교회도 건물의 외부 환경은 움베르토 바소의 작품 정도는 아닐지라도 좀 더 주변 환경과 친근감을 나눌 수 있는 분위기로 바꿀 뿐만 아니라 내부도 주목성이 강한 색채로 일관된 게시물들을 하루 속히 정리하고 예술적으로 수준 높은 작품을 수용하여 좋은 찬양과 더불어 예배의 품격을 한껏 높여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천 미술사학자인 한스 로크마커의 "그리스도인 됨이 하루 종일 할렐루야를 흥얼대며 돌아다니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 의해 거듭난 생명을 진정한 창조력을 통해 드러내는데 있듯이, 그림 속의 인물에 후광이 둘러져 있다거나 할렐루야 소리가 들린다 해서 모두 기독교 회화인 것은 아니다"란 말이 문득 떠오른다.

허진권(목원대학교 기독교미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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