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성호칼럼] 죽이는 불평, 살리는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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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호칼럼] 죽이는 불평, 살리는 비판
  • 옥성호
  • 승인 2012.03.09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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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호의 기독교 문화를 깨운다(1)

뜻밖에도 옥한흠 목사님의 아들이라고? 목사도 아닌 집사가 감히 교회를 비판한다고? 비판은 열등감에 가득 찬 인간이 즐겨 하는 사탄의 도구 아닌가? 가뜩이나 한국 교회가 이래저래 욕먹고 있는 판에 교회를 살리겠다고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평신도가 대체 뭐 하는 짓이지?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를 출간했을 때, 많은 사람들 특히 상당수 목회자들의 반응은 이런 식이었다. 저자로서 가장 답답했던 것은 책을 읽지도 않은 채 ‘뻔하다’는 생각으로 일단 불평의 날부터 세운다는 점이었다. 어떤 이들은 책에 대한 소문만 듣고 이런 이야기도 했다.

“그 책에 제대로 된 대안이 있어? 아니, 대안을 떠나 남 비판해서 남는 게 뭐지?”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내게는 전혀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성숙을 가장한 불평자’로 보인다. 불평을 할 때도 어떻게든 ‘영적 핑계’를 갖다 대며 자기 자신을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다독거려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라고 할까? 나는 비판에 대한 신념을 현재로선 버릴 수 없다. 정말로 내게 중요하고 또 내가 사랑하는 것이라면 더 비판적이어야 한다. 그 비판은 파괴를 위한 비판이 아닌, 살리기 위한 비판이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조롱의 수준으로까지 비판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분열시키고 망하게 하기 위해서 그랬을까? 그런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기뻐했을까?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무조건 다 좋아!”라고 말하는 것 이면에는 ‘사실 그 대상에 별 관심이 없다’ 혹은 ‘문제점을 지적해 봤자 어차피 해결도 안 될 것이다’ 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아파트를 계약할 때 매매계약서를 읽지도 않고 무조건 ‘긍정적’으로 웃으면서 다 좋다는 식으로 인감을 찍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자세가 긍정적이고 성숙한 것일까? 아니다. 그런 태도는 ‘어리석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자기에게 중요한 문제라면 비판적으로 더 차근차근 따지게 마련이다.

사랑해서 또는 소중해서 하는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창조적인 비판’이다. 진정으로 교회가 중요하고 말씀이 소중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오늘의 교회를 말씀에 비추어 점검하는 태도를 게을리할 수 있겠는가?

물론,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의 주장이 모두 맞을 수는 없다. 더 많이 보완되고 또 분명히 비판받아야 할 부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뜻이 교회 속에 이루어져 간다고 나는 확신한다. 문제는 성숙의 가면을 쓰고 비판을 배격하는 불평은 건전한 논의 자체를 실종시킨다는 데 있다.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가 ‘부족하나마’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서 나는 다 답을 제시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이를 통해 건전한 토론이 이뤄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는 노력과 인내가 합쳐질 때, 우리 교회 속에 ‘탁상공론의 신학’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신학’이 뿌리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거룩과 성숙을 가장한 불평들’ 대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건전한 비판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모아야 할 때이다.

옥성호 (국제제자훈련원 출판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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