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박물관 대신 교회를 세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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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박물관 대신 교회를 세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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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2.2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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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제 목사 (평촌평성교회)

봄이 오고 있다. 그리고 봄과 함께 부활절도 다가오고 있다. 부활절이 다가오면 한번쯤 생각해 보는 생각! 올해는 무엇으로 이 부활절을 의미 있게 보낼까? 고난 주간도 지키고, 특별 새벽기도도 해보고, 이웃을 돌보는 일도 해 본다. 그러나 가장 근본이 되는 생각은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생각해 보는 일이리라!

주님은 왜 교회를 세우셨을까? 말할 것도 없이 교회로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 세우셨다. 그것은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나타나는 사도들의 메시지의 핵심이 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주님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왜 박물관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셨을까? 그리고 주님은 왜 그 교회를 서로 함께 하는 공동체로 세우셨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주님은 왜 교회를 세우는 대신 왜 박물관을 만들지 않으셨을까? 미래를 내다보시는 주님은 당시에 이미 어떤 증거물품들이 유용할 것이지를 알고 하나하나 치밀하게 수집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정황을 증거하기 위해 잘 보존된 빈 무덤과 십자가와 손과 발에 박혔던 못, 입으셨던 수의와 로마 당국 사형 집행관들의 보고서, 그 주변에서 구경했던 사람들의 일기, 그리고 부활의 아침에 로마군의 핵심 권력자들에게 보고된 열린 무덤에 관한 보고서들, 그 날에 일어났던 각종 소동에 대한 보고서 등을 챙겼더라면 꽤 그럴 듯한 부활 박물관을 만드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부활사건은 그런 식으로 증명될 성질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말한 그런 증빙자료들은 물론, 설혹 당시에 카메라가 개발되어 있어서 무덤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 주님이 무덤을 열고 나오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찍었다 한들 그것이 오늘날 증거가 되겠는가?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조작이다! 연출이다!” 등의 끝없는 논쟁에 휘말리고 말 것이다. 아무 소득도 없이!

그렇다면 세상으로 하여금 주님의 부활을 믿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부활을 논증하는 잘 준비된 확신반이 필요할까? 거기서 부활에 대한 각종 의심들을 효과적으로 논박하면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을까? 아무리 그래도 세상이 주님의 부활을 적극적으로 믿기에는 무언가 부족할 것이다. 최선의 경우 부활을 부인하지 못할지 모른다. 기껏해야 “기독교의 부활의 믿음이 그렇게 허황된 것만은 아닌 것 같더라!”는 식일 것이다.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언가 좀 더 적극적인 증거가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증인이다.

그렇다. 주님이 교회에 기대하는 것은 박물관의 증거물품들의 증거 이상이다. 그리고 잘 준비된 확신반 강의 이상이다. 그것은 지하철역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라고 말하는 정도도 아닐 것이다(물론 그것도 필요하다 할 수 있지만). 그리고 교회들이 연합해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면서 길거리에 포스터 붙이고, 그 날 아침 온 교회가 모여 한 도시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것이 전파를 탐으로써 전 도시적 이벤트가 되게 하는 정도도 아닐 것이다(그것이 일정 부분 연합의 의미는 갖지만). 왜냐하면 사실 그런 행사는 아무리 크게 해도 주님의 부활이 ‘사실로서 증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교회에 기대하신 증거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박물관이나 세미나, 강의나 전단지, 교회 연합 이벤트가 아니라 삶이다. 기독교인의 삶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정말 오셨으며, 그들을 위해 정말 죽었고, 정말로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온 세상의 주가 되셨음이 사실이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삶의 특징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세상은 그들의 사는 모습을 통해 주님이 살아계심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세상으로 그 주님을 보게 하는 안경이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이런 삶의 특징을 개인적으로 또 공동체적으로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이 믿음의 삶은 그 분의 거룩한 사랑을 핵심 내용으로 할 수 밖에 없고, 그 사랑은 근본적으로 ‘서로’와 ‘함께’가 있는 공동체를 통해서만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절을 앞두고 한국 교회가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 각 교회공동체 안에 이런 삶을 더욱 수준 높게 담아내는 일로 고민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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