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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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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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11.16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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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돈 교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고3 딸을 대학에 보내야하는 부모 입장에서 답답한 심정이 하나 둘이 아니다.

마치 이 세상에 아이를 볼모 잡힌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이가 초등학교부터 12년을 공부하고, 공부한 결과를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평가 받는 심정이 참 착잡한 것이다.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아이만 노력한 것이 아니라 부모 된 죄로 같이 겪는 어려움도 적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마치 삶의 모든 목표가 이 대학에 있는 듯이 매일 새벽에 일어나 밥 하고, 기도하고, 노심초사 밤을 같이 지샌 아이의 엄마가 무엇보다도 큰 수고를 했음이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이 어느 대학이라는 한 결과로 나타나니 현재 우리 집은 초긴장 가운데 있다. 살얼음을 걷는다는 것이 이런 것인지, 서로 날카로워진 심정을 숨기며, 서로를 감싸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불안하기는 서로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런데 아이를 대학 보내며 몇 가지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 수시라고해서 몇 개 대학에 원서를 내는데 그 돈이 만만치 않다. 도대체 그 많은 돈이 다 필요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몇 만원씩 6개 대학에 낸 본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벌써 50만원 가까운 돈이 드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본고사와 다름없어진 논술고사라는 것을 치르기 위해서 또 학원에서 요구하는 것이 있다. 지원하는 대학에 맞춰진 논술준비 과정을 들어야하는데 과정별로 또 몇 십만 원씩 한다. 그랬더니 벌써 이것이 몇 백만 원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제 수시에 합격을 하면, 그 통지와 함께 곧 입학금을 넣어야한다. 몇 백만 원하는 돈이 준비되어 있어야한다. 그런데 더 좋은 대학에서 입학하라고 하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또 등록금을 넣어야한다. 물론 앞에 넣은 돈은 금방 돌아오지 않으니 적어도 두 대학 등록금 넣을 준비를 하라고 입시 선배가 일러주었단다. 그래서 계산을 해 보니 1천만 원은 훌쩍 넘고, 요 두, 세달 사이에 1천5백만 원은 준비되어야하는 것 같다. 우리 집만 특별한 것도 아니고, 언론보도를 보니 이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

이렇게 쫓아가다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마치 장례식장에서 경황없는 유가족에게 거래를 시도하는 장의사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요즘은 장례식장도 정가제가 되어서 이런 바가지가 없어졌다는데 대학과 학원은 이들보다도 더하다는 생각이 든다. 뭐라 항의할 수 없는 입시생들에게 원서 장사를 하고, 시험 며칠 남은 아이들에게 마지막 족집게 강의에 바가지를 씌우고, 입학여부를 ‘현찰 박치기’로 강요해 내는 대학들을 보면 처음 말한 대로 아이를 볼모로 이렇게 물어 뜯긴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입시라고 하는 것이 무한경쟁에 빠져 있는 이 사회의 적나라한 현장인 것은 잘 알고 있다. 우리 아이도 이러한 경쟁의 굴레 안에서 살아보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다. 경쟁 자체에 대해서도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지만 이 경쟁에 대해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이 경쟁이 적어도 돈으로 하는 경쟁은 아니었으면 하는 것이다. 10여년 학원비와 과외비에 치여서 서러웠던 아이들이 이 마지막 한, 두 달 동안 몇 백만 원, 천여만 원 하는 현금 동원력이 없어서 자기 실력에 맞는 대학을 못 가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정말 그 마지막 한, 두 달에 벼랑 끝에 몰려있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등쳐먹는 그 장사꾼들 때문에 12년 멍든 가슴이 찢어지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천사가 다녀갈 때 동하는 물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베데스다 연못의 전설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 첫 사람이 되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연못가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 이 병자들처럼 우리는 이 병든 사회에서 일등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38년 누워있는 병자를 도와 연못으로 데려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등 되는 것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그 연못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이 병을 낫게 해 줄 것이라고 선언한다. 세상은 일등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지만 예수는 그게 아니라 그 이름이 생명을 살리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이 옳으냐고 묻는다. 자신들이 세워놓은 그 룰을 깨어버린 예수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이 연못가에서 누가 될 것인지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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