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성경, 한국 선교의 문빗장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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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한국 선교의 문빗장을 열다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1.01.2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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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이어온 ‘하나의 성경’ 전통

1885년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들은 어떤 성경을 가지고 왔을까. 바로 일본에서 1884년 번역된 이수정역 신약 낱권 번역 한글 성경을 들고 왔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문이 굳게 닫혀있던 한국. 국외에서 번역된 성경이 국내 선교의 빗장을 연 것이다.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 1883년 5월 16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평신도들에 의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다. 이 교회를 세운 서상륜은 만주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치유를 받았다. 이후 로스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를 도와 1882년 ‘예수셩교뉴가복음전셔’ 번역작업에 참여했다.

한국 교회 최초의 선교사도, 최초의 교회도 신약이지만 한글 성경을 가지고 시작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한국 교회가 시작부터 성경 위에 세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 최초의 한글 성경과 한국 교회
올해는 한글 성경이 완역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11년 성경 전체가 한글로 완역된 ‘셩경젼셔’가 출간됐다. 최초의 복음서는 1882년에 나왔다. 그 이전인 1877년경부터 로스와 메킨타이어 선교사, 이응찬, 서상륜 등 한국인 번역자들이 만주 심양에서 한글 성경 번역작업에 착수했다. 이후 1882년 누가복음이 출간됐다. 당시 성경 번역 배경에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이 있었다.

만주의 번역과는 별도로 일본에서도 수신사로 파견된 이수정이 1883년 번역작업에 착수했다. 이수정은 일본 성서공회에 파송된 미국 루미스 선교사의 도움을 받았다.

한글 성경 덕분에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성경을 가지고 출발했다. 이 역사적 배경은 지금까지 영향을 미쳐 한국 교회는 다른 나라에 비해 목회와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성경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한국 교회 선교 초기부터 교인들은 성경공부에 열심히 있었다. 성경을 읽고, 배우고, 공부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많았다. 1907년 일어난 평양 대부흥의 배경에도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사경회 운동이 있었다. 이 사경회은 기도운동, 회개운동으로 번졌고 이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평양 대부흥인 것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1887년 성서 번역 자문위원회를 만들어 다시 번역작업을 시작한다. 로스 번역 성경이 한국인 번역자들의 영향으로 서북지방 사투리가 많았고, 번역상의 미흡한 점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후 성서공회와 연합해 상임성서위원회로 발전했고, 1895년 성서공회가 설립됐다.

이후 성서공회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 대표들과 선교사들이 주축이 돼 성서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성서보급과 번역 활동을 펼쳤다. 1911년 최초의 한글 성경전서가 출간된 이후에도 더 나은 성경번역을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번역의 오류와 맞춤법의 변화, 단어 의미의 변화를 겪으면서 개정 번역의 필요성이 생겨난 것이다. 보다 더 원문의 의미에 가깝게 번역하기 위한 번역자들의 노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수차례 개정작업을 펼쳤지만 한국 교회는 ‘하나의 성경’을 계속 사용해오고 있다. 

# 문맹 타파와 여권 신장
1910년 당시 한국은 한문 중심의 문자체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유명무실했던 반상제도였지만, 양반들은 한문을 문자로 여겼으며 한글은 천대했다. 당시 상류 사회는 우리말을 쓰면서도 한자로 언어생활을 했다. 서민들도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나 필요도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글 성경을 바탕으로 시작된 기독교 선교는 한글 보급과 문맹 타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선교사들은 서민들에게 성경을 읽히기 위해 먼저 한글을 가르쳐야 했다. 한국 교회 선교 초기 학교가 먼저 세워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전을 한글을 사용하면서 천시 받던 한글이 우리글로 정착하는 계기가 됐다. 서적을 권한다는 의미의 권서, 전도부인(여자 권서) 등을 통해 한글이 가르쳐졌고, 이들이 전국을 다니며 글자를 가르치고 문맹 타파에 앞장섰다. 성경 보급을 위한 권서들의 활동이 한글을 민족의 언어로 정착시키는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그렇다면 로스는 왜 한글로 성서를 번역했을까. 한글이 모든 일반의 대중적인 언어였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한국에서 언문이 분리된 한자가 아닌, 한글로 번역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한글의 우수성에 주목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실제로 로스는 한글을 열심히 배우고 사전도 편찬했다. 우리말과 글이 일치돼야 한다는 점에서 선교사들의 안목과 시각이 옳았다.

한글 성경의 보급은 당시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여성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선교사들이 성경을 가르치면서 여성들도 자연스럽게 글을 깨우치게 됐다. 이는 한국 교회 초기 여성 지도자들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또한 성경의 사상과 지식이 전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남녀 평등사상이 전파됐고, 이는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졌다.

또 여성은 한 가정에서 신앙의 뿌리가 돼 남편과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면서 전도가 이뤄졌다. 사회적으로 소외됐던 여성들이 복음을 통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 한글 성서 번역의 미래
새로운 번역에 대한 욕구는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보다 원문에 가까운, 보다 쉬운, 보다 표준적인 성서를 번역하기 위한 노력도 여전하다. 최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 같은 의역된 성경이 유행하고 있다. 또 아가페 출판사의 ‘쉬운성경’도 청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그러나 한국 교회 선교 초기부터 지켜온 ‘하나의 성경’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교회성을 가진 공식 기관에 의한 철저한 번역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성서 원문은 변하지 않지만 단어의 의미 변화와 사회 변동성, 스마트폰 등 기술의 발전이 번역에 영향을 미친다. 성서공회를 비롯한 한국 교회의 대비가 필요한 대목이다.

성서공회는 한국 교회 성서 번역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원문연구소를 설치해 성경 원문에 대한 연구책자를 연 2회 발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성경 번역과 관련된 성과를 축적하고 좋은 학자들과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국내외 유수한 성서신학자들을 초청해 성서 번역의 이슈를 가지고 세미나도 진행하고 있다.

또 한 가지. 북한 선교를 고려해야 한다. 하나의 성경 전통은 통일 이후에도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봉수교회 등에서 우리의 공동번역 성경을 북한 맞춤법에 맞게 고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동번역 성경은 개신교에서 성공회가 사용하고 있다.

현재는 남과 북이 사용하는 한글 맞춤법이 다르다. 반세기 넘게 분단을 겪으면서 단어의 의미 자체도 많이 달라졌다. 이 때문에 통일 후 맞춤법 통일안이 논의되는 시점에서 통일 이후 성경 번역에 대한 논의도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남과 북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성경’을 만들어야 과제를 안고 있다. 성경 번역에 계속돼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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