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변화되는 청년들 보며 떠날 수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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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변화되는 청년들 보며 떠날 수 없었죠”
  • 현승미 기자
  • 승인 2011.01.1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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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프랑스 유학생들의 김치 엄마 최현숙 목사

예기치 못하고 시작한 사업이었다. 그 사업이 잘못돼 연고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 단돈 100만원을 들고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시간과 돈만 들어갈 뿐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상황은 악화돼가고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예수님의 마을’을 담임하고 있는 최현숙 목사와 프랑스의 인연은 그렇게 악연으로 시작됐다.

“당시 대형 딸을 갓 시집보내고, 아들은 고3 수험생이었죠. 그 어느 때보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필요한 시기였죠. 아들에게 딱 2주만 다녀오겠다고 약속했는데, 벌써 프랑스에서 생활한지 8년째네요.”

당시 큰 식당을 운영했던 최 목사. 그에게 프랑스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권사로 출석하며 유럽선교회 활동 당시 딱 한 번 방문한 것이 전부였다. 예기치 않게 어려움을 당한 이를 돕느라 ‘면류관 공예사’를 인수한 그는 한 프랑스 유학생의 제안으로 옷과 뱃지, 프랑스와 영국간의 통합 국기, 유로터널을 상징하는 뱃지 등 1억원 분량의 물품을 수출했다. 그런데 프랑스 통관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해결할 방도가 없자 고민 끝에 직접 프랑스에 가게 된 것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다니면서 최자실 목사님이 저에게 사역자의 비전을 보여주셨는데, 저는 세상 일에 어두워 온전히 주님 일을 하지 못했어요. 프랑스 통관 클레임 사건은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연단이었죠. 다방면으로 애를 써도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점점 어려움만 쌓여갔어요.”

한때 죽음까지도 생각했던 최 목사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한 채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루 한끼만 먹으며, 40일 작정 기도에 돌입했다. 작정기도가 끝난 일주일 후 다시 세 차례의 작정기도를 드렸다.

“교회 안에서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자 영적으로 갈급한 남녀 유학생들이 하나 둘씩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밤에 찾아오면 함께 철야를 하고, 새벽에 오면 함께 새벽예배를 드렸지요. 저는 제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기도를 시작했는데, 주님을 나를 그렇게 사역의 길로 이끌고 계셨어요.”

연고지도 없이 무작정 찾아간 파리에서 믿을 곳은 하나님의 집 밖에 없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바로 파리의 순복음교회. 하나님은 그곳에서 최현숙 목사의 앞길을 보여주셨다. 이곳에서 성령체험한 학생들은 공부가 힘들거나 마음이 괴롭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방탕한 곳으로 가지 않고, 교회로 찾아와 하나님께 예배 드렸다.

자신의 고통을 치료 받고자 시작했던 그의 기도는 어느덧 순복음교회 교인들을 넘어 타교인들까지 함께 동참하게 했다. 그것은 곧 파리의 새벽을 깨우는 새벽기도의 시초가 되었고, 지금도 파리에서는 연합으로 또는 각 교회별로 새벽기도의 불을 밝히고 있다.

▲ 최현숙 목사 저 '예수님의 마을'
그렇게 최 목사는 청운의 꿈을 안고 찾아온 프랑스 유학길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절대 견딜 수 없었던 청년들, 학업 완수를 위한 긴 장정을 행군하는 그들 곁에서 신앙의 어머니로, 기도의 동역자로, 그리스도 안의 한 형제자매로 함께했다.

당시 유학생들은 타향살이의 외로움, 고향음식에 대한 그리움 등 어려운 공부와 함께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고 있었다.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최현숙 목사는 ‘사랑의 전화’를 개설했다. 밤이든, 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기꺼이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어주고 함께 기도하면서 위로의 동역자가 돼 주었다.
청년들은 크리스천으로서의 비전을 꿈꾸게 됐고,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이제는 사회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어엿한 사회인이 됐다.

“하나님은 나에게 수많은 자녀들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지금 그들은 모두 박사, 교수, 사모, 연구원들로 사회 각계각층에서 지도자로 크게 활동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다. 만두집, 민박집 등을 운영하면서 ‘파리의 밥퍼’, ‘파리의 김치 어머니’ 등으로 불렸다. 손과 발이 부르트고 온몸이 쑤시는 고통 속에서도 70~80명에 달하는 식사를 혼자 준비하면서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유학생들의 변화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1997년에 한인 성도와 유학생들로 조직된 ‘사랑의 소리 선교단’은 지하철역, 양로원, 교도소, 병원, 미자립교회 등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선교단 초대 지휘자 김도준 씨는 현재 명성교회 지휘자로, 3대 지휘자 소프라노 송미향 씨는 목민교회 지휘자로, 6대 지휘자 테너 정욱 씨는 파리 국립오페라 합창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준비없이 오른 프랑스행에 또 하나의 걸림돌은 비자 문제였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18시간씩 걸리는 영국을 버스로 오가며 스탬프를 받아야 했다.

여정도 힘들지만, 경비를 마련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20년 전 국내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로 사역했던 경력을 인정받아 프랑스 쁘앙드쥬흐교회에서 정식 선교사로 임명받고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2004년에는 임파선암 진단을 받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다섯 차례의 항암주사와 스무차례의 방사선 치료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주변인들의 염려 가운데에서도 그는 자신의 사역을 감당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치유의 역사를 허락하셨다.

프랑스 유학생들의 어머니였던 그를 대신해 하나님은 그의 자녀도 올곧게 양육해 주셨다. 사위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명문대의 교수로 세워주셨고, 딸은 현명한 아내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고 3이었던 아들은 이제 30대 후반의 건실한 가장으로 아름다운 가정을 꾸렸고, 한국과 프랑스를 이어주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가진 돈이 많았을 때도, 주변의 사랑을 독차지할 때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다가 깨도 감사하고 몸이 좀 피곤해도 감사하고, 잠 한숨 못자고 일해도 그것 또한 감사합니다. 환난과 핍박이 와도 이 고난을 잘 견디면 받을 면류관이 크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학생들이 기도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손수 허름한 창고를 헐고 기도실을 만들어 ‘예수님의 마을’을 세운 그는 교회 등록을 위해 지난 2007년 예장중앙 총회에서 목사 안수까지 받았다.

이제 ‘예수님의 마을’에 단순한 기도와 쉼의 공간을 넘어 어린 꿈나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탁아소’와 ‘유치원’이 세워지길 꿈 꾸는 최현숙 목사.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의 사역에 동참할 귀한 영적, 물적 동역자를 세워주셔서 ‘예수님의 마을’에 미래 세계의 인재가 될 크리스천 주역들이 생활하는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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