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목회, 마음의 자세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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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목회, 마음의 자세에서 나온다”
  • <뉴욕=윤영호 기자>
  • 승인 2010.11.24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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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미주 한인교회 부흥을 말하다


‘해피목회론’으로 건강사역 전개하는 이규섭 목사

뉴욕에서 가장 뿌리깊은 ‘퀸즈한인교회’

상처의 골이 깊게 파인 한인교회 ‘치유 목회’ 열정 다해
인위적 첨가제 없는 본문 중심 강해 설교로 본질에 충실

고등학생 시절 확실한 부르심을 받은 이후 오직 한 길, 소명의 길로 인도함을 받은 이규섭 목사(뉴욕 퀸즈한인교회 담임 사진).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목회는 항상 즐겁게 하라.” “목회는 즐거운 것이다.” 30년 사역인생을 앞두고 있는 이규섭 목사가 외치는 이같은 ‘해피 목회론’은 자신의 건강사역을 유지하는 남다른 비결이다.

‘해피목회론’이라고 해서 장황한 이론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생각은 매우 단순했다. 처한 환경은 언제나 똑같고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가 일반 사람들의 숙제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해답은 “그 환경을 바라보는 마음의 자세”에 있다는 것이다.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나로부터’시작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목회현장을 즐거운 마음으로 마주대하는 것이 이규섭 목사가 말하는 ‘해피목회론’이다.

하지만 이규섭 목사가 털어놓은 사역현장의 실상은 그리 해피하지는 않아 보였다. 본인 스스로를 ‘잡초’, ‘돈키호테’라고 말할 정도로 이 목사가 걸어온 ‘소명의 길’은 거치른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비유될 만큼 고비 고비를 지나는 ‘고뇌의 시간들’이었다. 그럼에도 이 목사는 그 환경들을 ‘해피’로 대응한 것이었으리라.

● 사역 2기 ‘뉴욕 최고(最古) 퀸즈한인교회’에서 시작
이규섭 목사가 퀸즈한인교회에 온 것은 2년 전. 41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로, 뉴욕한인 이민공동체를 묶은 상징적인 교회이다. 이미 은퇴한 한진관 목사는 퀸즈한인교회를 한인의 가슴 속에 짙은색으로 남긴 원로이며 지도자로 유명하다. 원로 한진관 목사의 목회흐름을 어떻게 발전적으로 계승하느냐가 이규섭 목사를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원로목사는 보수성이 짙은 목회를 추구했다고 전하는 이 목사는 퀸즈한인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은 불신자 출신으로 이 교회를 통해 복음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라고 했다. 따라서 퀸즈한인교회 교인들은 이 교회가 자신들의 삶이고 생활일 만큼 성도들에게 교회가 차지하는 자리는 매우 크다고 했다.

2년 전 퀸즈한인교회에 부임한 이규섭 목사는 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보고 마음이 무거웠다고 술회하면서 “꽤 긴 기간 담임목회자가 없어서 생긴 상처들이 커 보였다”고 말했다. “전임 목사가 이 교회를 떠난 뒤 퀸즈한인교회는 일 년 기간 담임목회자 없는 교회였다고 합니다. 나름 기도도 하면서 후임목회자 청빙을 위해 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항상 그렇듯이 사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죠. 보이지 않는 갈등의 골이 생기고 오해가 증폭되면서 상처들만 무성하게 생기는 현상들이 나타났다고 전해 들었죠.”

이규섭 목사는 미국 서부 로스엔젤레스에서 17년 사역을 끝으로 자신의 1기 사역을 마무리하고, 2기 사역을 뉴욕에서 가장 오래되고 뿌리 깊은 퀸즈한인교회에서, 그것도 이 지역에서 존경받는 원로 한진관 목사를 모시고 새 사역을 시작한다는 것에 영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담임에 부임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치유였고 안정과 평안이었음을 금세 알게 됐다.

그는 해피목회론을 스스로에게 강조해온 목회자다. 목회란 것이 내가 하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끌려가는 것이고, 모든 성도들이 끌려가도록 돕는 일이기에 결코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주눅 들거나 기가 죽는다든가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꽤 오랫동안 자신을 향해 강조한 그였다. 새 부임지는 첫 발부터 ‘하나님을 붙잡는지 환경을 붙잡는지’ 이 목사를 테스트하기 시작한 것이다.

● 너무 빨리 시작된 인생의 희노애락을 안고
이규섭 목사는 6남매 중 막내다. 작은 체구와 작은 얼굴의 천진스런 웃음은 그가 막내로 살아온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목사는 자신의 성장사를 ‘잡초’로 설명한다.

“누군가 부어주는 물을 받는다든지 행여 추우면 추울까 더우면 더울까 바람막이도 해주고 때론 그늘도 되어준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죠. 하지만 전 그렇지 못했습니다. 정확히 그런 혜택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잡초…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라는 잡초, 이게 바로 접니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일 당시, 이 목사 가정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극한 어려움의 길로 들어섰다. 격동의 시기였던 1977년, 정치, 경제분야에서 큰 격변을 겪을 때 이 목사 가정도 호된 바람을 맞아야 했다. 당시 최상위 대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생활비조차 힘겨웠던 이 목사에게는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만이 살 길이었다.

홀로 서울에 상경한 그는 서강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장학금으로 들어갔고 총신신대원 졸업과 함께 이루어진 미국행 후로부터는 아르바이트를 멈춘 적이 없다. 억척 인생을 대변할 그의 한마디는 이렇다. “미국 LA동문교회를 92년에 담임했죠. 32세란 젊은 나이에 한인교회 담임이 됐는데, 부임후 5년만인 97년에 첫 건축을 했고 이어 2003년에 두 번째로 교회를 건축했죠. 당시 저는 교회 안에 있는 화장실 5개 내부 타일공사를 직접 했습니다. 타일을 깔 정도로 노동에 숙련된 사람이죠.”

목회자가 될 비전으로 역사를 전공한 그는, 하지만 음악에 더 큰 소질을 발휘했다. 아르바이트 목적으로 시작한 교내 보컬그룹이 가수활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과거 TBC주관으로 열린 제3회 젊은이의 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유명세를 탔다. 방송인 황인용씨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고정출연해 청취자와 통기타를 치면서 토크쇼를 진행하며 노래하는 일을 2년 동안 했다. 지금은 없어진 서울 신촌 왕자다방에서도 DJ를 하며 이름을 날린 것도, 여타 알려진 가수들과 친분을 쌓은 것도 그 때였다. 그는 유혹을 뿌리친 일도 있다고 기억했다.

“생활비가 절박할 때 소위 야간업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거액을 제시하면서 고정출연을 제안했죠. 돈은 필요했지만 돈 때문에 신앙과 목회자의 비전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가수로서 비교적 여유 있게 대학을 졸업한 이목사는 총신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하지만 예상 못한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입학하고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는데 어이가 없더라구요. 또 다시 생활고에 접어든 것이죠.” 가수로서 얻은 수입금에 턱없이 모자란 전도사 사례비가 문제였다. “어쩝니까. 잘 견디는 것도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즐거움으로 극복했죠.” 해피목회론의 시작은 어쩜 이 때였을 지도 모른다.

총신에서 M.Div.를 마치자마자 가족들을 찾아 미국으로 온 이 목사는 한인교회에서 영어예배부(EM)에서 사역하며 영어를 심도있게 익혔고, 이를 기반으로 그 어렵다는 목회상담학을 배우며 목회 지도자로 철저한 훈련에 돌입했다. 낯선 미국교회에서 첫 사역을 시작한 그는 불과 5명인 영어예배부를 2년 동안 맡으면서 70명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는 “아마 한인1세로서 영어예배부를 맡은 최초의 한국인 사역자가 바로 나 자신일 것”이라며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것을 언제나 알 수 있었을 시기였다.”고 말했다.

● 미국에서 이루어진 첫 담임사역지 LA동문교회
이규섭 목사가 담임목회를 맡은 것은 그의 나이 32세, 사역자로 교회에 첫 발을 디딘 지 꼭 10년째인 1992년이었다. 하나님은 이 때 두 교회에서 청빙을 받게 하셨다. 한 곳은 교인 150여명의 안정된 자립교회였고, 다른 한 곳은 재적인원 40명에 하향세가 확실한 교회였다. 항상 그렇듯이 하나님은 ‘더 어려운 교회’로 가길 제안하셨다. 이 목사는 순종했고, 그로부터 17년 후의 결과는 양적인 측면에서 봐도 교인 500명이라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 목사가 처음 설교할 때 동문교회에 모인 교인 수는 18명. 청빙목사였지만 개척목회자였음이 분명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다만 설교를 녹음해서 인근 슈퍼마켓과 한인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놓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설교테입 전도는 교인 중 한 권사가 시작한 것이 정착됐다.

“모르긴 몰라도 설교테입 전도는 우리 교회에서 가장 먼저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뒤로 다른 교회에서도 시작하더군요.” 효과는 컸다. 10월에 18명이었던 교인이 12월에 40명으로 껑충 뛰었고, 이듬해 9월, 즉 부임 1년 만에 교인은 100명을 넘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말이 절로 나왔던 때였고, 실제로 지금까지 그같은 은혜 속에서 목회하고 있다고 했다.

화려한 결과 뒤에는 반드시 뼈를 깎는 아픔이 있는 법. 이 목사도 두 차례 심장마비를 일으킬만한 치명적인 사건들을 경험해야했고, 목회의 시련 가운데 이목사의 장남까지 심리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호소했다. 목회와 가정 속에서 분출되는 인생의 용암과 맞서야했던 그였다.

“아끼던 부목사가 우리 교인을 데리고 개척을 했습니다. 그것도 우리 교회 바로 옆에서요. 엄청난 충격파를 맞은 것이 사실이었고, 몸이 견디지 못했나봅니다. 심장마비로 이어지더군요. 이후로 한 번 더 쓰러졌고 갖가지 질병의 원인이 된 듯합니다.”

하나님은 이 목사를 호되게 훈련시켰다고 스스로를 평했다. 겉모양은 잡초지만 속은 숙성된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잠재력을 다진 기간이었음을 그는 부인할 수 없다. 심장마비라는 문제를 안고 있지만 하나님은 사도바울에게도 그랬듯이 이규섭 목사에게도 ‘붙잡힌 사역자’라는 특별한 경험을 갖길 원하셨다. 두 차례 교회건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동문교회에서 1기 사역은 성도 500여명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영적 공동체로 확장하는 가운데 최홍준 목사(부산호산나교회 담임) 사위인 고형권 목사에게 후임바통을 넘기고 뉴욕에서 제2기 사역을 펼치는 중이다.

이목사의 1기 사역은 목회의 기초를 단단히 다지는 시기였다. 충실한 현장경험은 물론이고 21세기 교회성장과 부흥의 요소로 부상된 ‘목회상담’의 전문가로 자리를 굳힌 기간이기도 했다. 목회상담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LA지역 교회에서 목회상담을 확장시킨 주인공이었고, 한인 라디오 방송에서 생방송 상담으로 큰 효과를 보였다.

“목회상담은 현재도 부상하는 만큼 미래목회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잘 훈련된 목회상담가는 교인들을 신앙 안에서 새 삶을 살게 하는 인도자요 우울증으로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인도자역할을 톡톡히 해낼 겁니다.”

빠르게 변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교인들이 경험하는 상처를 다양한 측면에서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 이목사의 견해이다.

● “설교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하향세 내리막 교회를 상향세 성장형으로 바꾼 이규섭 목사는 현재 상처의 골이 깊게 파인 퀸즈한인교회에서 치유목회를 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다고 했다. 그는 목회라는 것이 설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모든 사람들이 설교에만 주목하는 현상을 안타까워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목사는 한국 교회를 목회자의 위기면서 교회의 위기라고 진단하고 있다. 설교가로 전락한 목회자의 위치를 빨리 제자리로 돌려놔야 교회가 그 역할을 회복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목회는 목회자가 만난 하나님을 교인들에게 전해주고 증거하는 총체적인 삶의 행위라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목회자의 삶은 투명해야 하고 정직해야 하고 곧아야 합니다. 그래야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최근 경향은 목회자를 설교로 평가하려는 것이 대세죠. 물론 설교는 목회자로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목회자를 설교가로 묶어놓으면 본질이 흐려질 수 있죠. 인격과 인품으로 소통돼야 할 부분이 다른 것으로 채워지기 때문이죠.”

이 목사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 “물을 타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위 설탕물같은 인위적인 첨가제를 되도록 자제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추구하는 설교방식은 철저한 본문중심의 강해식 설교이다. 강해설교는 말씀의 깊이를 더해주고 문맥을 벗어나지 않으며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에게는 진지한 연구를 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매력 있는 방식이라고 이 목사는 강력 추천한다. 그는 주일설교의 경우 직전 화요일까지는 완성한다. 다만 나머지 기간을 지나면서 부분적으로 첨삭을 반복한다. 그래서 그는 설교 때문에 압박감을 받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매우 강력하고 자신감에 차 있으며 설득보다는 선언과 선포에 가깝다는 평이 많다. 치밀한 준비와 받은 영감이 강력한 설교를 출산하게 한다는 얘기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목회원칙이 있다. 목회공간과 가정공간을 철저히 구별하는 것이다. 그래야 목회자 가족에게 스트레스가 최소화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첫 담임지였던 동문교회에 작지만 자신만의 업무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개척교회일수록 담임목사 업무공간이 가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전 9시 출근에 퇴근은 오후 6시. 아무런 일이 없는 날에도 그는 규칙적인 목회사역을 꾸준히 지켰다. 현재는 어렵다고 느끼지만, 당시 새벽기도회에는 2시간 기도를 시작으로 저녁에 1시간, 총 하루 3시간 기도습관을 지켰다고 한다. 만약 아무도 오지 않은 새벽기도회 때는 눈물로 뒹구는 뜨거운 기도시간을 갖기에 안성맞춤의 시간이라고 오히려 감사했다고 한다. 기도야말로 목회자가 목회자로 살 수 있는 영적 힘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이 목사는 목회의 기본원칙으로 강조한다.

이규섭 목사는 후학들에게 단 하나 “기본기에 충실하라.”고 특별히 강조했다. 목회자를 유혹하는 갖가지 목회기능과 기술들이 많아지는 세상 속에서 절대로 기본기를 놓치면 않된다고 거듭 강조한다. 화려한 기술에 현혹되는 시대를 살면서 겉으로 그럴듯한 이슈를 멀리하고 내실을 다지는 근면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목회자여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나 자신도 그런 목회자로 살려고 지금부터 겸허하게 2기 사역을 섬기는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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