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4강) 왜 기쁜 소식을 들은 신자가 고난 받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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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4강) 왜 기쁜 소식을 들은 신자가 고난 받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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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11.18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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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문제

마가복음은 “복음의 시작”이란 단어로 시작된다(막 1.1). 우리 말 성경은 소유격이 앞에 나오지만, 헬라어에서는 수식하는 단어 뒤에 나오는 까닭에 원문하고 차이가 난다. 앞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표지 혹은 제목을 “복음”(euangelion)이라고 말하였다. 당시의 책의 형태가 두루마리였으므로 대체로 맨 앞에 등장하는 단어가 그런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복음의 의미는 “기쁜 소식”이다. 따라서 복음을 들은 이들은 당연히 기쁘고 즐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가 당대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였다. 마가공동체의 교인들은 로마제국 및 유대교의 박해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박해적 상황 속에서 마가공동체의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기쁜 소식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왜 기쁜 소식을 들은 그들은 고난과 고통을 겪고 있는가?

어쩌면 이 문제는 마가 당대의 그리스도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서고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왜 복음이란 기쁜 소식을 들은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이런 까닭에 마가복음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문제를 다루는 책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다른 복음서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록하면서 핍박 모티프를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증거는 주님의 고난을 알리고 있는 수난 기사(記事; Passion Narrative)가 각 복음서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다. 마가복음은 8장 27절부터 시작됨으로써 전체 이야기 가운데 56%를 차지하는데 반해, 16장부터 시작하는 마태복음에서는 46%, 9장부터 시작하기는 하지만 중간의 누가만의 자료에 해당하는 아홉 장을 빼면 누가복음에서는 33%를 차지한다.

마가복음의 경우, 복음서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에서부터 주님은 자신이 받을 고난과 죽음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다(막 8:31). 그 이후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두 번 더 수난예언을 하시고난 뒤에(막 9:31; 10:33-34)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예루살렘에서는 유대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그들의 위협이 증가하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가룟 유다의 배신을 계기로 주님을 체포하여 불법 재판을 받게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재판은 무고한 주님을 흉악한 범죄인으로 만들어 잔혹한 십자가형을 받게 하여 마침내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미 복음서의 중앙에서부터 주님의 고난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가복음은 첫 번째 수난예언이 고지된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전반부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고, 후반부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 전까지의 전반부(1:1~8:26)에서 주님은 모두 15개의 기적을 행하시며, 온갖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두 번의 급식(給食) 기적을 통하여 수많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시었다. 이런 모습은 그 나라 백성의 고통과 아픔을 친히 해결해 주시는 왕의 통치행위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영광의 왕이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 이후로는 수치스럽게도 종처럼 고난을 받고 죽으시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 마가복음의 요절인 10장 45절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왕으로 오셔서 당연히 뭇사람의 섬김과 봉사를 받아 누리셔야 하지만, 오히려 자신을 대속물로 삼아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종처럼 죽으셨던 것이다.

주님이 이처럼 고난을 당하고 죽는 모습을 통하여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는 마가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도 이 땅에 계실 때에 자기들처럼 고난의 길을 겪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또한 격려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왜 주님의 고난이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이 이후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의 성도들은 현재 자신들도 고난을 받고 있지만 장차 주님처럼 영광의 부활에 동참할 것을 믿었기 때문에, 고난 중에서도 인내하며 기뻐하였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일찍이 체험한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김경진 교수<백석대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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