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疏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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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疏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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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11.1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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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건 목사<고려신학대학원장>

최근에 법정이 글로써만 서로 의사를 표시하고 십여 년을 지낸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이혼하라는 명령을 하였다는 뉴스를 들었다.
한 집에 살면서도 서로 대화가 없었고, 상대를 향한 요구사항이 있으면 글을 써서 알리기만 하였다는 것이다.

서로 감정의 교류가 없이 같이 살기만 하는 것을 가정이라고 할 수 없다. 소통이 없는 부부, 소통이 없는 부모와 자식, 소통이 없는 형제, 소통이 없는 이웃, 소통이 없는 직장 동료… 이런 공동체는 얼마나 불행할까 생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일이다.

최근에 ‘소통’이라는 말이 키워드로 제기되고 있다. 소통이 가장 잘 안되는 대상이 국회의원, 대통령, 그리고 공무원으로 지적되고 있다.

선거 때에는 그들도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고 허리를 굽힌다. 그때에는 국민의 말에 귀를 가장 잘 기울이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선이 되고 나면 왜 소통이 안될까?
그 이유는 첫째, 권위주의에 젖어있다. 둘째, 국민의 마음을 읽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셋째, 국민의 필요를 채워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자기의 이권을 위해 싸우는 전사(戰士)들과 같다.

그런데 시민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집단이 또 있다.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도시 속에 있으면서 실제 그 지역 주민들과 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가 자기 이기주의에 빠졌다. 상대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찰(寺刹)에 가서 땅 밟기까지 한다. 주간에 교회당이 문을 굳게 닫고 있다. 주민들은 교회를 전혀 들어갈 수 없는 성역과 같은 곳으로 인식한다.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방을 찾아가야 하고, 또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의 필요를 알아야 한다.

소통을 가장 잘 실천한 대표적인 예를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마구간에 탄생하셨기 때문에 목자들의 방문을 받을 수 있었다.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셨다. 거기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물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너무 뻔한 말인 것 같지만, 이것은 그 병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는 질문이다. 병자는 온통 병이 낫고 싶어 하는 것이 관심의 전부이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다가간 것이다. 그는 예수님에게 “나를 물에 던져 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에게 사람이 없었다. 물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벅적이고 있지만 그 병자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다가간 것이다.

삭개오는 많은 사람들 속에 있었지만 그들 속을 파고들 수 없는 처지이기에 뽕나무 위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자였지만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기에 외로웠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님이 다가갔다. 예수님이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내려오라!”고 부르셨고,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의 욕구를 채워주신 것이다.

단순히 사람이 옆에 있고, 또 서로 말을 한다고 해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필요를 알아주고,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소통할 수 있다. 정치인들이 사람 속으로 들어가서 그 필요를 바로 찾아낼 수 있어야 불통의 불명예를 벗을 수 있다.

교회도 문을 열자. 교회당을 주민을 위한 장소로 개방하자. 그들을 이해하고 필요를 채워주는 일로써 소통을 시작하자. 교회가 산속에 있지 않고 동네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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