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선언, 영적 싸움과 민주화 및 통일 향한 행동”
상태바
“88선언, 영적 싸움과 민주화 및 통일 향한 행동”
  • 표성중 기자
  • 승인 2010.11.08 14: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광선 박사,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 심포지엄에서 ‘88선언’ 증언과 고백

“88선언 기초작업의 참여는 저의 신학과 신앙의 싸움이었으며, 하나님과의 대결이며 씨름이었고, 분단의 십자가를 지고 순교하신 아버지가 부활하는 길은 민주화와 평화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믿고 행동한 것입니다.”

▲ 서광선 박사(이화여대 명예교수, 전 교회협 통일위원회 위원)
서광선 박사(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지난 6일 새문안교회 언더우드교육관에서 한국기독교역사학회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주최로 열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문서의 분류와 DB화’ 학술 심포지엄에 기조강연자로 참여해 ‘88선언’과 관련된 비화를 공개했다.

88선언은 지난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교회협)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다. 당시 서광선 박사는 기초위원 및 대표집필자로 참여했다.

서광선 박사는 “당시 88선언 최종 원고를 교회협 실무진에 넘기면서 1995년을 ‘통일희년’으로 선포했다. 정말 그리고 진심으로 아무 의심 없이 95년만 되면 통일의 조짐이 보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단한 희망사항이었고, 대단한 믿음이었다”고 회고했다.

“1970년대 학생들과 기독교 진보 개혁 세력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일하면서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분단을 이유로 민주주를 거부하고 민주화운동을 탄압했습니다. 5.18 광주항쟁 탄압의 명분은 바로 분단논리에 있었습니다.”

서 박사는 “당시 민주주의와 통일의 관계는 ‘선 민주, 후 통일’이냐, ‘선 통일, 후 민주’냐 하는 논쟁 속에 빠져 있었다”며 “일부 지식인 계층에서는 ‘선 통일, 후 민주’를 강조했지만 교회협에 소속된 교회 지도자들은 ‘선 민주 후 통일’을 주창하며 시민단체들과 함께 인권 및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전두환 정권, 이른바 5공 아래서 이와 관련된 모임을 갖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9인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당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소수이지만 목숨을 내건 교회와 학계의 지도자들이 모여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평화와 분단 극복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서 박사는 “우리는 늘 정보부의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서울 시내 여러 곳을 전전하며 비밀리에 비밀 장소에 함께 모여서 밤을 새워 가면서 논쟁도 많이 하고, 한숨도 많이 쉬고, 원고지도 많이 불태우면서 ‘88선언’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88선언’을 만드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서 박사는 “평화통일 문서에 대한 신학적 기반, 남과 북을 향한 건의, 한국 교회를 향한 호소 등 어느 것 하나 쉽게 마음이 모아지지 않았다. 목회자와 학자간의 신학적 의견이 다를 때는 얼굴을 붉히며 싸울때도 많았다. 그 중에서 남북 분단을 원죄로 규정하는 부분에서는 많은 마찰이 있었다”고 소회했다.

이어 서 박사는 “우리는 1972년 남북정상이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의 3대 원칙인 자주, 평화, 사상ㆍ이념 제도를 초월한 민족 대단결의 원칙에 동의했고, 여기에다가 인도주의적 원칙과 통일 논의의 참여 권리를 주장하는 2가지 원칙을 더했다”고 설명했다.

“5가지의 내용으로 구성된 88선언이 터져 나온 뒤 우리 기초위원들은 숨을 죽이고 교회와 정부 당국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을 반공법으로 걸어 일망타진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있었지만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당시 통일부 장관의 초청으로 통일원 고급관료들 앞에서 88선언을 설명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서 박사는 “이것은 개인의 영광 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영광이며 승리라고 자부하고 싶다”며 “88선언은 정부당국에 의해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88 올림픽 전야인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으로 이어지게 됐다”고 피력했다.

그는 “88선언에서 건의한 많은 부분이 현재 남한 정부 당국에 수용되고 실천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남북한 긴장완화와 평화증진’을 위해 건의한 평화협정, 주한미군 철수, 비핵화와 군축 문제는 6자회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 요원한 상태”라고 아쉬움을 전했다.

서 박사는 “88선언은 신학적 신념과 신앙 양심에 근거한 것이며, 평화의 종으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십자가 선교에 행동으로 동참하는 각오로 만들어 선포한 ‘카이로스 선언’ 이었다”고 평가했다.

“우리 세대는 휴전 체제의 남북 평화 공존이라고 하는 노력 속에 살아 남았지만 이제는 통일의 문턱에서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길로 향하는 젊은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주면서 모세처럼 죽어가야만 합니다. 분단시대로부터 평화와 공영과 공생 공존의 시대를 넘어 통일의 시대는 이제 젊은이들의 몫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