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맺어주신 모녀의 인연, 제가 더 많은 것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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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맺어주신 모녀의 인연, 제가 더 많은 것을 받았어요”
  • 현승미 기자
  • 승인 2010.03.24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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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으로 낳은 넷째 딸 키운 이은화 권사


주위에서는 대단한 일을 한다고 칭찬을 많이 해주시는데, 사실 전 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아무리 내 속으로 낳은 자식들하고 똑같이 대하겠다고 마음먹어도 그렇지 못할 때가 있거든요.”

교회 회보에 넷째 딸이 편지 형식으로 남긴 글을 통해 ‘사랑’을 고백한 아이의 글을 보고 자신이 더 감사하고, 미안했음을 고백하는 이은화 권사(군자중앙감리교회).

올해 대학에 진학한 이 권사의 네 번째 아이. 우연한 만남을 통해 인연이 됐지만, 이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한 가족이 됐다.

“그 아이가 3살 되던 해였어요. 갓 결혼한 올케가 놀이방을 열었는데, 그 아이가 첫 손님이었지요.”
형편이 어려워 따로 장소를 구할 수 없어 이 권사의 집에서 놀이방을 하게 됐다. 2월 28일 개원. 3월 1일 첫 손님으로 세 살 난 여자아이를 품게 됐다. 이은하 권사의 올케는 사정이 어려운 부모를 대신해 종일반으로 아이를 맡았다.

부모의 퇴근 시간에 맞춰 데려가는 종일반이 아니라 하루 24시간을 함께 해야 하는 ‘종일반’이었다. 가족처럼 함께 자고, 먹고, 생활하는 그런 나날이 이어졌다.

‘반석놀이방’. 하나님 말씀 아래 굳건하고 바른 아이로 키우겠다는 의미에서 세워졌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처음엔 의욕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아무리 유아교육을 전공했어도 한번도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올케가 아이를 맡아 키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결국 아이를 더 이상 못 맡겠다며 저에게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아이를 부모에게 다시 돌려보내야 할 것 같다더군요.”

이은화 권사 부부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아이를 키우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 아이를 만난지 딱 6개월 만이었어요. 처음에 놀이방에 왔을 때 얼굴에 누군가에게 꼬집힌 자국이 역력했는데,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놀이방에 오기 전 이미 다른 가정에 한번 맡겨졌던 것 같아요. 두 아이가 있는 집이었는데, 그 아이들 사이에서 육적으로 심적으로 상처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형편이 어려워 맡긴 아이를 다시 부모 곁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또다시 누군가의 손에 맡겨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 맡겨진다하더라도 그 아이의 앞길이 평탄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셋째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으니, 어느 정도 다 자랐잖아요. 그래서 우리 부부가 아이를 맡기로 했죠.”

모태신앙으로 자란 이은화 권사. 몇 대째 믿음의 집안에서 자라 역시 몇 대째 신앙을 가지고 있던 남편을 만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극히 평범하고, 평탄한 삶을 살아 왔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아이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사람이기에 서로 인간적인 신뢰를 맺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그 아이도, 저희도 서로에게 적응하느라 많이 힘들었죠. 특히 일주일에 한번 친엄마를 만나는 날은 아이가 엄마한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죠. 아직은 엄마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3살, 어린나이에 일주일에 한번 엄마를 볼 수 있었던 그 아이에게 삶 자체가 고통이었겠지요.”

아이로서는 ‘내 엄마’가 아닌 타인을 ‘아빠’, ‘엄마’라 부를 수도 없고, 쉽사리 정을 붙일 수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권사 부부는 하나님이 맺어주신 그 인연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IMF를 거치면서 저희도 생활이 어려워졌지요. 이미 아이가 셋, 그리고 한 명의 아이.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라 학비며, 생활비며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죠.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은 했지만,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기도 했지요. 잘 키울 수 있게 해달라고, 잘 자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지요.”

하나님은 딱 그만큼 주셨다. 기도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스레 실천하는 그들에게 주변 사람들을 통해 살 길을 열어 주셨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소녀가장으로 등록할 수 있게 해주셨다.

고등학교는 비교적 비용이 덜 드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내신 성적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열심히 공부해 1등도 했지만, 중간에 온가족이 안산에서 시흥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지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됐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을 다니고 싶었지만, 형편상 학원을 보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길을 예비해 주셨다. 온 가족이 출석하던 교회에서였다. 40년 만에 자신의 출석 교회로 돌아온 이명용 교수(용인대). 아이의 사정을 알고 이 교수는 1년 동안 매주 토요일이면 교회에서 밤 11시까지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아이의 진정한 멘토가 돼 주었다. 훗날 본인이 받은 은혜를 또 다른 어려운 이들을 위해 써야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아이가 많이 내성적이었는데, 이 교수님을 만나고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공부는 워낙 열심히 했지만, 인성적으로도 많이 케어를 받았던 거 같아요. 직접 눈앞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우리에게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답니다.”

어릴 적에는 가족사진조차 함께 찍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이방인이기를 자처했던 아이. 이 권사 부부의 따뜻한 관심과 언니 오빠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변화된 그 아이는 어느덧 그 사랑을 깨닫고, 오히려 그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하는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가 돼 있었다.

“남편 장로님이 저랑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보수적인 분이세요. 아이들에게도 신앙적으로나 생활적으로나 엄격한 분이시죠. 잘못한 일이 있으면, 네 아이 모두 똑같이 호되게 야단을 치셨어요. 십일조 생활, 주일성수도 절대 빠져서는 안 되죠.”

남편을 전적으로 믿었기에, 아이들 교육부분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남편의 방침을 따랐다는 이은화 권사. 오히려 여느 아이들처럼 비뚤어지지도 실족하지도 않고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 그리그 그 아이들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환갑을 앞둔 나이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워 새벽기도회에서 피아노 봉사를 하고 있다는 이은화 권사.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는 이 권사 모친이 그러하듯이, 자신도 평생 그렇게 살 수 있기를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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