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의 탄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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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의 탄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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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1.2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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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목사<예장 통합 기획국장>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심각한 성격 장애나 심리적 장애가 있다고 판단되는 어린이들을 그 가정 전체를 상담하고 문제점을 발견해 일종의 치유를 시도하는 프로그램으로 알고 있다.

요즘 어린이들은 예전에 비하면 지나치게 과잉보호를 받거나, 혹은 완전히 버려져서 비참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한 예를 든다면, 수퍼마켓에서 어린아이가 진열대에 쌓아놓은 물건들을 모두 쓰러뜨려버린다. 수퍼마켓에서 일하는 점원이 달려와 어린이에게 “이게 웬일이냐, 이러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하지만 그 어린이의 어머니가 그 점원에게 언성을 높여 항의한다. “왜 남의 아이 기를 죽이느냐. 그깟 물건 값 다 물어주겠다.” 그렇게 과잉보호를 받은 어린이는 자라면서 과연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인지 몹시 걱정스럽다.

옛 이야기 중에는 큰 도둑이 되어 형무소에 갇혀있는 아들을 면회 간 어머니의 혀를 물어뜯으며 “왜 나에게 도둑질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며 울부짖는 아들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대부분 문제가 생기는 어린이들의 대부분은 일관성이 없는 부모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란다. 엄마의 기분에 따라 같은 일에 대해 심하게 야단을 맞기도 하고 그저 그렇게 지나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같은 일을 했을 때 웃으며 농담으로 지나가기도 한다면, 과연 그 어린이는 어떤 기준을 배우게 될까?

한국 교회는 몸집으로만 치면 다 큰 어른이다. 덩치가 커졌으니, 당연히 삶의 기준도 착실히 배워서 성숙해 졌어야 옳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반 기독교 세력에 대한 개탄은 있는데 진정한 회개는 없다. 진정한 회개가 없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 보다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거짓과 타협함으로 바른 길을 찾지 못한다. 우리들 모두는 자식을 망치는 부모와 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오냐, 오냐, 잘한다, 잘한다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요즈음이다.

어린 자녀들에게 올바른 삶의 기준,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려면 마음이 좀 아파도 때로는 매를 들기도 하고, 서로 힘들어도 올바른 자식의 미래를 위해서는 부모와 자식이 함께 참고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기독교 윤리의 실종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한국 교회의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가 금권으로 얼룩진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의 윤리성이 도마에 오른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정치와 타협하고 정치권 안으로 아예 편입되기도 한다.

한국 교회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교세가 성장하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는 발전의 그늘진 곳에는 기본적인 윤리를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망치는 달콤한 속삭임들이 있었다. 바늘을 훔쳐온 아들을 눈감아준 어머니가 있었다면, 금권선거를 주도한 교회 지도자들을 눈감아준 우리 모든 기독인들이 있다. 말도 안되는 떼를 쓰는 자녀를 오냐오냐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게 된 아버지가 있다면, 편하게 이랬다저랬다 하는 신앙생활 하겠다는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한 목회자들이 있다.

얼마 전, 뜻하지 않게 왼쪽 발목 인대가 약간 늘어나서 걸을 때마다 괴로웠다. 결국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임시로 발목을 고정시키는 부목을 대고 생활하게 되었다. ‘인대’라고 하는 것이 평상시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이렇게 탄력성을 잃으면 많이 아프고, 몸의 한 부분을 동여매고 있어야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요즘 내 발목의 상태를 경험하면서 한국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기독교 윤리가 좀 늘어졌다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탄력성을 잃어버리면, 기독교 윤리는 더 이상 자체 정화의 탄력성을 찾지 못하고 일그러진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교회에는 아직 자체 정화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한국 교회는 아마도 우리 지체의 한 부분을 단단히 동여매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기다려야 할 것이다. 참을성과 일관성, 이 두 가지로 한국 교회가 지금의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성숙하고 건강하게 자라나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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