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90) 어린아이와 부자 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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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90) 어린아이와 부자 관원
  • 승인 2008.02.1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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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와 부자 관원: 영생은 졸업증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기도에 대한 두 편의 이야기 이후(눅 18:1-14), 누가복음은 9장 50절부터 이탈하였던 마가복음의 순서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첫 번째로 누가는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두 이야기, 즉 어린아이에 대한 축복(눅 18:15-17)과 부자 관원 이야기(눅 18:18-30)를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두 이야기는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 누가는 19장에서 그만의 독특한 이야기인 삭개오 사건(눅 19:1-10)을 추가하여 이 문제를 설명함으로써 부자들을 위한 목회적 권면을 강화시키고 있다.

어린아이를 축복하는 이야기는 어린이를 하나님 혹은 메시야를 인식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성인으로 간주하는, 또한 세상은 분별력을 갖춘 나이에 도달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당대 유대인들의 그릇된 인식에 대한 꾸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린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축복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아이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한 부모의 어린아이들이 이미 하나님의 가족에,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준다. 왜냐하면 그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은 또한 아버지 하나님이시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 자녀를 돌보시는 아버지의 통치로 이해하지 않는 한 그 나라의 성격을 오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제자도의 자연스런 모델이 되는데, 사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함에 있어서 어린아이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어린아이처럼 유치하도록(childish) 가르치지 않는다. 주님이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어린이의 특징 중 하나인 수용성, 즉 당황하지 않고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이다. 예수님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눅 18:17).


어린아이와 대조하여 부자 관원(마태는 청년)은 자기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기대하였다. 그는 모종의 테스트를 통과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율법 준수라는 초등 종교의 테스트는 통과하였다고 믿었고(눅 18:20-21), 이제는 그보다 더 고상한 고등 종교의 테스트를 통과하고자 하였던 것이다(눅 18:22).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부자 관원의 요구에 부응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처방전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에게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명령은 자신의 재물과 공로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라는 교훈을 주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진리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부자 관원에게 주님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눅 18:19)고 던진 질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주님 자신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원이 추구하는 축복의 참된 성격을 가리키는 것이다. 영생은 졸업증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고, 그런 의미에서 영원한 선(Goodness)과의 교제를 뜻한다. 그렇다면 관원은 “내가 어떻게 해야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적합한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했어야 마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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