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89) 불의한 재판관 비유와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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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89) 불의한 재판관 비유와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 승인 2008.02.1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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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재판관 비유와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 기도란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는 것

 





누가복음의 문학적 특징 중 하나가 두 개의 이야기나 비유 혹은 사건을 한 쌍(a pair)으로 묶어 중요한 교훈이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눅 10:25-4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마르다/마리아 이야기). 그 특징이 누가복음 18장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는데, 누가는 기도와 관련된 두 개의 비유를 함께 묶어 기도에 대한 주님의 교훈을 소개하고 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눅 18:1-8)과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눅 18:9-14).

기도에 대한 강조는 누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로서 11장에 이어 18장에서 다시금 반복되며 부각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비유와 관련하여, 재판관의 부정(不正)에 대하여는 이미 구약에서도 자주 언급된 바 있다(출 23:6, 신 16:19, 전 5:8, 사 10:2). 재판관은 편파적인 재판만이 아니라 과부, 고아, 가난한 자, 외국인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보호자가 되어, 그들과 관련된 소송에 있어서 최소한 그 권리가 보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출 22:22, 신 10:18, 시 68:5, 사 1:17; 렘 22:3). 그런데 비유의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종교적 원칙도 없고, 사람을 무시함으로서 대중의 여론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물인데, 뇌물을 제공할 재력도 없고 영향력 있는 힘센 친구도 없이 오직 간청하는 것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는 과부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와는 달리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돌아보시는 의로운 재판관으로써, 그들이 요청할 때 그 탄원을 들어 기꺼이 응답해 주신다. 이와 같이 자신의 안녕과 안일에만 관심 있는 불의한 재판관에게도 끈질긴 간청이 통하였다면, 그 택하신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에게는 얼마나 더 통할 것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궁극적 신원(伸寃)을 기대하며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눅 18:8). 요컨대 이 비유는 바람직한 기도의 자세로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지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기도자에게 요청되는 전제로서 정신적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하였지만 사실은 그 중 한 사람만 기도한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향한 것인데, 바리새인의 관심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기도에 등장하는 동사는 모두 일인칭이며, 그 기도는 부정적인 덕목과 사소한 경건의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겸손한 세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한 반면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義)와 종교적 업적을 의지하고 있다. 모든 바리새인이 다 그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신앙행위와 율법 준수에 대한 바리새인의 강조는 영적 교만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경건을 의지한 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편 세리는 허물과 잘못 투성이였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다. 그런 까닭에 자신이 죄인임을 바르게 인식하였다. 부정한 삶을 산 까닭에 도움을 요청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었지만, 그러기에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정직한 겸손이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는 확실한 길임을 깨닫게 된다. 세리가 선하고 바리새인이 악해서가 아니라, 세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바로 그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온전히 맡겼는데, 이것이야말로 기도의 참 자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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