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64) 성도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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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64) 성도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 승인 2007.07.1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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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청하는 친구 비유: 성도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 김경진교수·백석대 기독신학대학원
주님의 모범적 기도에 이어 누가는 기도와 관련된 비유와 부연 설명을 통하여 기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좀 더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간청하는 친구의 비유>(눅 11:5-8)는 뒤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눅 18:1-8)와 함께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 그 자세는 한 마디로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끈기 있게 기도하는 것이다(“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 눅 11:8;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 눅 18:5). 적당히 대충 기도하다가 응답이 지연되는 듯하면 쉽게 포기해 버리고 마는 나약한 기도가 아니라, 목적하는 바를 이룰 때까지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이다. }




물론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무엇이든지 끈질지게 간청하기만 하면 들어주시는 분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까닭에 최근 들어 어떤 이들은 유대 팔레스타인을 포함하여 중동지방에서 흔히 발견되는 “수치와 명예”라는 문화적 요소를 고려하여 눅 11:8의 “간청함(anaideia)을 인하여”를 “수치를 피하기 위하여”라고 달리 해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해석도 일견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정작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여전히 이 단어를 우리말 성경의 간청함과 유사한 importunity(KJV, NIV, RSV), persistence(Jerusalem Bible, NRSV)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해석 역시 이 같은 범주에서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앞서 언급한 두 비유는 분명 같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즉 ‘좀 더 작은 것으로부터 좀 더 큰 것으로의 결론’(afortiori argument)을 추구하는 성경해석 방식이 그것이다. 먼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의 경우 요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을뿐더러 사람을 무시하는 그 불의한 재판관조차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들어주었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 18:7)는 것이다.




<간청하는 친구 비유> 역시 같은 맥락에서 풀이되어야 할 것이다. 즉 세상 사람들도 친구지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 밤중에 소란을 피우는 친구의 끈질긴 간청 때문에 요구를 들어준다면,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리는 사람의 기도(눅 11:9-10)를 외면하시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이 비유 다음에 나오는 주님의 해설을 통하여 확인된다(눅 11:9-13). 세상 사람들도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주지 않고,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지 않듯이, 즉 사람이 악할지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성도의 간절한 끈기 있는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마침내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것이다.




특별히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차이가 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인데(11:13), 마태복음에서는 ‘좋은 것’(agatha; 7:11)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특별히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는 누가신학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는 것으로써,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이 ‘성령’임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행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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