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는 생명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키는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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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는 생명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키는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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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11.1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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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호교수<칼빈대학교>


이명박 정부는 ‘창조적 실용주의’를 국정철학의 기치로 내세우면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실용주의 철학은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념보다는 실용’을 선택한 정부로 평가되면서 실용주의에 대한 학문적 관심도 고조되었다.

하지만 실용주의는 현 시대에 있어서 생명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실제적이요 물질적이며 제한적인 것으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주된 철학사상이기에, 이에 대한 생명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실용주의는 유용성과 효율성, 실제성을 중히 여긴다. 하지만 생명은 이 세 가지 모두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생명의 신비를 실용주의적 유용성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그 가치와 존엄성을 유용성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가치를 평등하게 인정한다. 성경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원리를 가지고 있고, 생명이 실용적인 가치로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님을 밝히고 있다.

또한 효율성에 대한 부분도 생명에 적용해서는 여러 문제점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이 효율성을 적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전도와 예배, 각종 교회 프로그램 등에서 효율성은 강조되어 왔고, 효율성은 정책을 집행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어 왔다.

효율이란 투자하는 노력으로 효과를 극대화하는데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만 하고 당장에는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내적 성장(성숙)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당장에 효과가 나타나는 반짝 행사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내실보다는 규모에, 봉사보다는 홍보에, 양육보다는 행사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

또한 실용주의 실제성은 교회의 영적 성장에 대한 목표를 모두 산술적으로 계산 가능한 구도로 바꾸어 놓았다. 예배참석 목표, 전도대상 등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목표들을 산술적인 수치로 바꾸어 양적 성장을 추구하게 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단 한번도 수치로 계산하신 적이 없다. 그리고 몇 명을 구원하시겠다거나 몇 명을 전도하시겠다고 수치로 목표를 세우신 적이 없다. 이는 생명의 많고 적음을 떠나 생명 그 자체가 최고의 가치를 가진 유일한 실존이며, 한 사람이든 셀 수 없는 사람이든 항상 최선을 다해 생명을 구원하심이 진리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실용주의의 유용성, 효율성, 실제성으로 접근하여 그 가치를 평가하거나 구원사역을 할 수는 없다. 다만 생명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구원을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실천성에 대해 유용성과 효율성과 실제성을 적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생명 자체가 목적이지, 생명을 위한 구원사역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실용주의에 의한 결과적 성과주의는 목회의 성공여부도 교인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기독교윤리는 동기와 과정, 결과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선해야 비로소 인정된다. 생명은 결코 결과로만 판단할 수 없다.

실용주의는 이처럼 생명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키는 무서운 사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중히 여기고,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하며, 실제적으로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실용주의적 원리와 가치들은 생명의 삼위일체적, 포괄적 그리고 유기적 의미를 왜곡시킨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신학적인 바른 이해와 함께 생명회복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관계에서,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동시에 모두 믿음 안에서 함께 가야함을 나타낸다.

교회나 신자는 하나님과 인간, 자연과의 삼위적 관계를 통해 전일적으로 함께 적용되어야 한다.

이 모든 관계를 함께 회복의 대상으로 삼아 삶에 적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회복, 윤리회복, 자연회복의 생명회복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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