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 청빈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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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 청빈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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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4.0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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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재목사<안동교회 원로>


98년 역사의 안동교회가 간직해 온 그리고 앞으로 간직해 가야 할 뚜렷한 의식이 있다. 그 의식은 처음 교회를 창립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98년의 역사를 이어온 사람들의 의식 저변에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선비정신이다. 선비정신이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청빈을 높은 가치로 여기며,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정신, 옳다고 생각한 신념을 굽히지 않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하겠다.


안동교회를 부르는 별명이 ‘양반교회’였다. 그것은 당시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지도자급에 있었던 양반들이 주동이 되어 세운 교회였기 때문이다. 이 이름에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특별한 교회임을 나타내는 별명이었다. 당시 사대문 안팎에 있는 장로교인 새문안·연동·승동·남대문 등의 교인들이 주로 서민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안동교회를 시작하고 주도하였던 인물들이 바로 북촌에 사는 영조·정조 이래 고종 초까지 150년간을 집권해 내린 노론의 양반들이었다. 궁내부 협판을 지낸 박승봉, 육군보병부령이었고, 강계부사를 지낸 한필상, 대지주였던 윤치소, 내부차관이었던 유성준, 내각서기관이었던 홍운표, 육군보병부위였던 이주완 등 고위 문무관들이 예수를 믿어 안동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였기에 양반교회란 별칭이 붙을 만 했다


양반이 다 선비는 아니지만, 양반이 예수를 믿으면서 그들 속에 더 강하게 선비정신이 자리잡게 되었다. 안동교회는 이런 선비정신이 투철한 양반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룩하면서 처음부터 신앙과 일치된 선비정신을 존중하였고 품위를 지키는 교회로 자리잡게 되었다.


초기에 이렇게 활동한 교회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선비정신이다. 교회가 설립된 것이 1909년이었기에 그 시대적 상황에서 선비정신은 바로 나라사랑의 형태로 나타났다. 어떻게 보면 교회를 세운 목적 자체가 바로 기울어 가는 국운을 다시 살리겠다는 나라사랑에 있었다고 하겠다. 전쟁이 나면 귀족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싸움터에 앞장 서 나가는 유럽 사회의 상류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식이 바로 선비정신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대체로 두 가지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개혁 정신이다. 처음 교회를 시작한 유성준이나 박승봉은 당시 개화파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현재 헌법재판소 뒤쪽에 천연기념물 백송(白松)이 있는데, 그 자리가 한말 개화의 선구자 박규수(朴珪壽)의 집터로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 박영교,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김윤식 등이 찾아와 그 지도와 영향을 받았다.


안동교회 2대 목사였던 김백원(은 1919년 3월 12일 차상진목사 등 12인과 함께 <十二人의 長書>를 만들어 한 통은 총독에게 보내고 한 통은 종로 보신각 앞에서 낭독하였다. 김목사는 이 때문에 1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김백원 목사는 박승봉 유성준 등과 함께 창문사 기성회에 적극 가담하여 모금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초대 한석진 목사와 2대 김백원 목사 그리고 창립멤버들의 이런 개혁적인 정신이 초기 안동교회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본으로 “양반교회”라는 별명을 갖게 하였다.


둘째 특성은 선비정신의 가장 기본인 청빈정신이다. 청빈정신은 단순하게 가난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3대 목사였던 이강원은 땔감이 없어 겨울에 냉골에서 지내면서도 교회의 장작에 손을 대지 않았고, 끼니를 굶어도 교회의 성미를 건드리지 않을 만큼 청빈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닌 분이었다. 유길준의 둘째 아들이며 안동교회 집사였던 유억겸은 연희전문학교 학감으로 일제하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지키는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는 자기가 받는 월급을 모두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어놓았다. 해방 후 군정 하에서 문교부장을 지냈으면서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집은 땔감이 없어 냉골이었고, 쌀이 부족하여 밤샘하는 문상객들에게 밤참을 내기 어려웠다고 한다.


안동교회 초기 역사에 나타난 지도자들은 그 시대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이 사회의 지도자로 각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유치원, 중학교, 전문학교 각 교육 분야에서, 한글의 바른 사용과 보급을 위해서, 여성의 역할 증대를 위해서, 그리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지도자들은 신앙적으로도 철저하였으며, 그들의 생활에 있었어도 남에게 모범이 되어 칭찬을 받았다. 이들의 나라 사랑은 단순한 애국이 아닌 선비정신과 신앙의 발로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이분들에게서 나라 사랑 방법을 많이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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