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에서 비춰오는 평화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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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서 비춰오는 평화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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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2.2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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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핵집 목사<열림교회>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사이로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갔다.(눅2:1)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약혼녀가 만삭이 되어 있다는 것은 불안하기 그지없다.

앞으로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닥칠는지 불안과 초조로 베들레헴을 찾아갔지만 그들에게는 잠잘 곳조차 얻을 수 없는 딱한 처지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오늘의 노숙자와 같은 신세였다. 인간으로서 어찌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닌  짐승의 우리에서 잘 수 있으며 짐승의 집에서 아이를 출산할 수 있겠는가?

이미 그들은 사람이기를 거부당하고 있는 셈이다. 요셉과 마리아의 삶은 어찌 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삶을 반영한 것이리라. 로마의 황제가 된 가이사 아구스도는 본래 그 이름이 옥타비아누스였으나 기원전 31년 오랜 전쟁 끝에 로마를 평정했다. 자신의 정적인 안토니우스를 악티움전투에서 물리치고 로마로 개선하며 로마의 황제가 된 사람이다.

그는 로마를 평정한 한 후에 자신의 이름을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신적인 위치에 올려놓았다. 당시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헤롯은 이런 기회를 상실할 수 없었다. 자신의 동족들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로마황제에게 영광을 돌리고 유다를 점령한 군대를 지원하고 그들에게 기꺼이 막대한 헌금도 드렸다. 막강한 힘을 가진 로마 황제로부터 신임을 얻고 권력을 보장받는데 급급했다.


로마황제를 위하여 지역을 재건하여 황제의 이름을 딴 황제의 도시를 선물하기도 했다. 곳곳에 로마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우고 로마식의 극장과 경기장을 만들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친 로마 정책을 폈고 자신은 로마황제의 신자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 길만이 살길이요. 그 길만이 유대 땅에 평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가 그 모양일 때 백성들의 마음을 어땠을까? 헤롯이 주는 모든 것에 만족하고 희희락락하고 있었을까? 아마 기존질서를 지키고 안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시대가 끝장나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꿈꾸어온 새날이 있었다. 그것은 메시아사상으로 그들의 깊은 살 속을 꿰뚫어 내려오고 있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손에 철장을 들고 적들을 정복하고 마침내 자신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들 안에서 그런 메시아를 찾을 수 없다는데 절망하고 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현실적인 대안으로 힘에 편승하고 로마에 기대어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고자하는 기대심리가 많은 사람들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다.


헤롯은 그런 심리를 이용해 로마황제의 힘을 빌어 사는 것이 평화를 가져다 준다고 선전했다. 과연 그럴까? 서두에서 꺼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요셉과 마리아가 짐승의 우리에서 출산을 했다. 칙칙하고 어두운 냄새나는 마구간의 의미가 무엇일까?

왜 거기에서부터 새 생명을 노래하고 있을까? 마구간은  말들이 먹고 자고 쉬는 곳이다. 당시 말은 전쟁의 도구였다. 로마는 말을 이용해 막강한 전차군단을 만들었다. 피 지배국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길을 닦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로마가 그렇게 땀 흘리며 닥은 길로 전차군단은 빠르게 이동해 로마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짓밟았다. 말발굽이 스쳐 지나는 곳마다 평화가 아니라 핏자국이 흥건했다. 살생과 죽음이 난무했다. 아무도 자신들의 아픔을 말하지 못했다. 그것을 평화라 했다.

예수님은 바로 전차군단의 말이 살고 있는 말구유 그들의 생명 줄을 쥐고 있는 말 밥통에서 태어나셨다. 말들의 밥통에서 생명을 말하고 평화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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