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용서해 달라고 매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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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용서해 달라고 매일 기도합니다”
  • 승인 2001.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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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르포 -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 '나눔의 집'에 가다 일제가 강요했던 치욕 역사에 남겨야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여는 위안부 할머니들. 벌써 10년째다.

열 일곱 살 앳된 얼굴, 고운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가 ‘성 노예’로 무참히 짓밟혔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준지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비웃기나 하듯 역사 왜곡 교과서를 만들어 자신이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감추려 하고 있다. 언제까지 가슴 도려내는 아픈 상처를 드러내야 저들을 향한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을까.

“사과 받아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 못 감는다”는 한 위안부 할머니의 한 맺힌 성토가 귓가를 맴돈다. 광복 56주년을 맞아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살고 있는 ‘나눔의 집’에 찾아가 보았다.

경기도 광주의 퇴촌면에 터를 잡은 나눔의 집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띤 것은 ‘대지의 여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조각상이었다. 위안부였다는 이력을 감추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은 전쟁의 피해자일뿐 조선의 순결한 여성임을 말하고 싶어서였을까. 하반신을 땅에 묻은 위안부 할머니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밖으로 내보이고 있었다. 자신은 더럽혀진 존재라는 심한 죄책감으로 전쟁이 끝나고도 차마 귀국하지 못하고 타향에 머물러야 했던 심경을 표현하듯 ‘대지의 여인’은 말못할 설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걸음을 옮겨 마당 건너편에 있는 동상 앞에 다다랐다. ‘못다핀 꽃’.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위안부 소개업자에게 속아 전쟁터로 끌려간 당시 위안부 할머니의 모습이 단정한 소녀의 형상으로 재현돼 있었다. 때묻지 않은 조선의 소녀들이 일순간에 성 노리개로 전락해 하루 30명까지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음을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본군에게 ‘공중변소’로 불리며 받은 비인격적인 처사와 그로 인한 수치, 질병과 임신에 대한 공포가 끊이지 않았을 소녀의 여린 마음을 감싸주고 싶어졌다.

“늘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그들의 세계에 이제 환한 빛을 쪼여주자….”

‘못다핀 꽃’ 동상에 헌정된 시의 한 구절을 읊으며 마음을 달래는 사이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이 소녀의 뒷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는 ‘고(故) 강덕경 할머니 1주기 추모비’와 맞섰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와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힘들게 사셨던 고(故) 강덕경 할머니의 사진은 위안부들의 삶을 되찾아 줄 수 없겠냐는 간절한 소망을 말하고 있는 듯 했다. 1i 임신한 상태에서 일본군이 자궁까지 들어내 여성의 특권인 아이마저 낳을 수 없었던 인생, 위로 한마디 없이 가족에게 쫓겨나 결혼도 못하고 쓸쓸히 홀로 살아야 했던 기막힌 사연, 산부인과병, 정신질환 등의 위안부 후유증으로 멍든 삶의 한을 후손들이 풀어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착잡한 심정을 뒤로하고 나눔의 집에서 운영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으로 향했다. 스피커를 통해 위안부 할머니의 육성 증언을 들으며 동원과정을 표현한 그림과 아시아 곳곳에 설치되었던 위안소 사진들을 지나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으로 재현된 위안소 모형 안에 들어가 보았다. 희미한 전등 빛 아래 좁은 침대, 세수대야, 창문에 걸린 흰 면 수건 한 장이 전부였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자화상을 확인하고 그들이 치료프로그램 과정 중에 그린 작품들 앞에 다다랐다. ‘빼앗긴 순정’, ‘우리 앞에 사죄하라’, ‘어린 시절’등의 작품은 일제의 만행과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단순한 구조와 정감 어린 색채 이면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담고 있었다.

입구에 쓰여진 위안부 최초의 증언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글을 다시 찾았다.

“우리가 강요에 못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두어야 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고쳐 쓰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자신이 당한 피해를 후손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억해 내기 싫은 과거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

나눔의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9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피해자에서 증언자로 살기로 결정한 나눔의 집 할머니들, 아픈 기억을 끊임없이 되살리며 늘 고민 속에 사는 그들의 여한이 생전에 풀릴 수 있을지…. 기자에게 수박 한쪽을 건네는 위안부 할머니의 자상하고 여유 있는 손길과 달리 역사 왜곡 교과서 문제로 할머니들을 예민하게 만들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돌아오는 길에 위안부 할머니들이 평안하시기를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내면 깊은 상처를 싸매주시고 어루만져 주시기를 간절히 구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돼 일본의 진실된 사과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배상이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마음 모아 올려드렸다.

57년만에 귀국 '위안부운동' 벌이는 강일출할머니

나눔의 집에서 유일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위안부 출신의 강일출 할머니(74)는 항상 일본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일본사람들을 다스리시고 그들이 우리 민족에게 행한 만행을 용서하시기를 구하는 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있다.

“전 가만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원수는 하나님께서 갚으시니까요.”

강일출 할머니는 역사가 올바르게 쓰여져야 하는 이유를 우리와 일본이 사이 좋게 지내고 동일한 역사를 반복하는 우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눔의 집으로 보내신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다. 수요일마다 서울로 나가 집회에 참석하고 편히 쉴 새없이 언론 관계자들과 만나 위안부의 진상을 밝히는 생활이 버겁긴 하지만 역사가 바로 세워지는 날까지 싸우기를 쉬지 않을 것이라고 순간순간 다짐하고 있다.

“우리는 고생했지만 후손들까지 당하게 할 수는 없어요. 일본이 확실히 사죄하기 전까지 눈감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강일출 할머니는 1943년 가을, 16세 때 중국 장춘의 목단강 위안소로 끌려가 해방 직전까지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해방된 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길림에 남아 타향살이를 했던 강일출 할머니는 지난 2000년 3월, 57년만에 귀국해 나눔의 집에 거주하며 활발한 ‘위안부’운동을 벌이고 있다.

구자천기자(jcko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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