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 찾아온 대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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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 찾아온 대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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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2.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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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홍 교수<천안대학교>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이다. 저녁 식사 시간이다. 수준있는 음식점을 찾고 싶었다. 분위기가 나는 식당에 갔다. 헨델의 음악이 흐른다. 세미한 음까지 들려온다. 우리의 대화도 지장이 없다. 음악 감상에 적격이다. 손님이 많지 않다. 공간의 여유를 누린다.

어두움 사이로 첫눈의 대지를 바라본다. 가로등 아래 하얀 세상이 사랑스럽다. 조금은 적막이 흐른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듣고 싶다. 흰 눈, 12월 그리고 캐럴송 아름다운 조화다. 예수를 기다리는 대림절이 아닌가! 캐럴이 더욱 그립다. 부탁한대로 식당 안에 캐럴송이 감미롭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기쁜 소식이 찾아온 식당이다. 10여명의 손님들이 캐럴송 사이로 입장한다. 중국인들이다. 생소한 말소리와 함께 음악은 더욱 조화롭다. 구주 예수를 맞이하는 사람들이었으면 하고 기도한다. 바로 대림절의 의미이다.

대림절은 라틴어로 아드벤투스(Adventus)인데, 그리스어 함께 계시다는 의미의 ‘팔우시아(parousia)’와 나타남을 뜻하는 ‘에피파네이아(epiphaneia)’의 복합어이다.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태어나심을 뜻한다.

참으로 놀라운 의미를 가지고 있는 복음, 좋은 소식이다. 기록에 남아있는 첫 번째 대림절(Advent, 대강절)은 5세기 이탈리아의 라베나(Ravenna)에서인데, 크리스마스 전 한 주일을 구주의 생일준비로 할애하며 시작됐다.

6세기에 들어서 로마에서는 대림절 예배의식이 도입되었고, 교황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540-604)가 처음으로 성탄절 전 4주일을 대림절로 선포하였다. 마이란드 같은 곳에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6주일을 대림절로 지내고 있다.

13세기에 이르러 대림절 예식이 프랜시스수도회를 중심으로 보다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교황 피우스 5세(Pius V., 1504-72)는 전 로마교회를 위해 대림절의식을 확정하였다.

일반적으로 독일교회는 신구교회를 막론하고 대림절을 엄숙하게 지킨다. 의식이나 그 어떤 의무적 절기로서보다는 거룩한 엄숙함이 함께 하는 네 주 동안 대림절을 센다. 아니 주님을 기다린다. 어두운 세상은 구주를 갈망한다.

첫 번째 대림절은 성 앤드류의 날인 11월 30일에 가장 가까운 주일이다. 동방교회에서는 서방교회 보다 길게 대림절을 지내는데, 11월 중순부터 6주간의 대림절이 시작된다.

전통적으로 이 대림절과 함께 비로소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된다. 엄밀하게 대림절의 성격은 기쁨과 설렘 그리고 낭만보다는 사순절에 가까이 있다. 대림절 예배에서는 일반적으로 부르는 ‘높은 곳에 계신 주께 드리는 영광’송도 생략한다.

대림절을 상징하는 보라색이 그것을 말해준다. 보라색은 참회를 뜻한다. 대림절에는 회개와 기다림이 있다. 물론 지독한 예수 수난의 십자가를 앞둔 사순절의 엄격함 보다는 덜하지만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천국 보좌를 버리고 오신 예수님, 십자가를 지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 성자, 베들레헴 마구간 구유의 탄생이 엄숙성을 고조시킨다. 그럼에도 예외적으로 세 번째 주일 저녁예배에는 빨간 장미색이 허용된다. 요사이 서구에서는 성탄절이 오면 빨간색 옷을 입어 이 땅에 오신 구주를 맞이하는데,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 그 보혈이 의미하는 진한 사랑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런데 이 대림절에 잊지 않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대림절이 주는 미래적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아니 선언적 의미이다. 물론 역사적 신앙이 우리에게는 요구된다. 2천년 전 낮고 낮은 몸으로 성육신하신 구주, 온 세상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신 갈보리 산 위의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한다.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 만에 다신 사신 영생의 주님을 우리는 믿고 기뻐한다. 그런데 잊지 않아야 할 분명한 점은 대림절이 다시 오실 약속의 구주를 기다리게 하는 절기라는 말이다. ‘내가 다시 오리라’는 구주의 마지막 약속을 성도들은 믿는다.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심판의 주로 다실 오실 예수님의 ‘팔우시아’, 재림도 기다리는 대림절이어야 한다. 여기에 대림절의 의미는 절정에 이른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다시 오실 구주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을 때만이 세계교회는 진정으로 성탄을 맞게 되는 것이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를 함께 아우르는 통시적 관점에 서서 우리는 주님을 기뻐해야 한다. 점점 세속화, 상업화로 치닫는 대림절, 성탄절에 다시 오실 재림의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보다 새롭게 대림절을 맞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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