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방위산업 기술 유출을 막은 구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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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방위산업 기술 유출을 막은 구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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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6.0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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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교수<천안대학교>

이치(李治: 당고종)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위력적인 고구려 철궁을 가지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고구려인 가운데서 그런 협력자를 찾지 못했던지 그는 문무왕이 우호관계를 열기 위한 사신을 파견해오자 답방 사자를 파견하여 신라인 구진천을 데려갔다(서기 670년).

구진천은 당시 벼슬이 사찬(신라 17관등 중 8번째 관등)이었는데 노사(弩師, ‘노(弩)’는 화살을 연속적으로 쏠 수 있도록 만든 장치로 사람이 쏘는 활보다 관통력이 뛰어나 배에 장착하여 전투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삼국은 경전, 천문, 지리, 기술 분야 등에 박사 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노사는 아마도 이 가운데 하나인 기술 분야 전문가인 것 같다)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치는 그를 데려다 나무로 된 쇠뇌를 만들게 했는데 처음에 화살이 3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이치는 “너희 나라에서 만든 쇠뇌는 1천 보(1보는 36cm)를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 만든 것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구진천은 “목재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라의 목재로 만든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치는 사신을 신라로 보내 목재를 요구하였고, 신라는 곧바로 대내마 복한을 보내 목재를 바쳤다.

이치는 즉시 쇠뇌를 개조하게 하였다. 그러나 개조한 후에 쏘아보니 6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이치는 그 이유를 물었다. 구진천은 “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목재가 바다를 건너올 때 습기가 배어들었기 때문인 듯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치는 그가 고의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큰 벌을 주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구진천은 끝내 그 기술을 당나라에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치는 아버지인 이세민이 안시성에서 1천보가 나가는 고구려 철궁에 맞아 눈과 무릎을 잃고 병을 얻어 죽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는 고구려 멸망 후 안시성에 이세민을 위로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고구려를 쓰러뜨린 뒤 그 활로 군사들을 무장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이민족들의 기마군대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문무왕은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다. 중요한 방위산업 기술자를 당나라에 그냥 보내 줌으로써 676년에 당군과 마지막으로 치룬 전투의 결과가 달라질 뻔한 우를 자초한 것이다. 만약 구진천이 당나라에 넘어가 활 제조기술을 넘겨주었더라면 신라는 통일전쟁에서 크나큰 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물론 구진천의 충성심을 믿고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국을 위해 방위산업 기술을 목숨으로 지킨 구진천은 비록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되지는 못했지만 신라인으로서 열전에 실린 그 어떤 인물보다도 먼저 열전에 실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구진천(仇珍川)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9년 조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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