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진의 신약읽기(22)
상태바
김경진의 신약읽기(22)
  • 운영자
  • 승인 2005.02.24 17: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복음서 - 산상설교

‘산상설교’ 중 제일 처음 나오는 부분을 우리는 팔복 선언이라고 한다(마 5:3~10). 어떤 이들은 11절을 포함해 사실은 구복(九福) 선언이라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복의 숫자를 따라 부르기보다 오히려 지복(至福, the Beatitudes) 선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 그 내용을 자세히 검토하기 위해,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와의 비교다(눅 6:20~26). 거기에는 복이 네 가지로 소개되고 있고, 그 네 개의 복과 대칭해 네 개의 화(禍)도 선언된다. 동일한 주님의 말씀인데 왜 이러한 차이가 생겨났으며, 과연 우리는 병행 구절 사이의 이런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두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차이는 해석의 걸림돌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각 복음서의 특징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네 개의 복(福)은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당하는 자에 대한 복이고(눅 6:20~22), 그에 상응하는 네 개의 화(禍)는 부요한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 받는자에 대한 저주이다(눅 6:24~26). 마치 네 개의 복과 화가 일대일 대칭을 이루듯이 나란히 소개되고 있다.

이에 비해 마태복음은 화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마태복음은 누가복음의 네 개의 화를 네 개의 또 다른 복으로 대체하여 팔복으로 만들고 있다. 이렇게 해서 추가된 복은, 온유한 자(5절), 긍휼히 여기는 자(7절), 마음이 청결한 자(8절), 화평케 하는 자(9절)에 대한 복이다. 그런데 이 추가된 네 개의 복의 목록이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관찰이다(온유한 자 = 시 37:11; 긍휼히 여기는 자 = 미 6:8; 마음이 청결한 자 = 시 24:3~4; 화평케 하는 자 = 시 34:14).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마태가 복음서 저술에 있어 그 주 대상이 되는 유대인 청중을 염두에 둔 까닭에, 새로운 도덕적 품성의 근거를 유대인의 삶과 행위의 기준이 되는 (구약)성경에서 찾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많은 학자들은 누가복음의 지복 선언이 본래의 전승에 가깝고, 마태가 그 내용을 다르게 수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확인 불가능한 그러한 전승적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상의 차이에 대한 해석이다. 이에 대한 일반적 해석은 이렇다. 누가복음보다 부요한 자들에 대한 태도가 관대한 마태복음에서 부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담긴 네 개의 화를 생략하고, 오히려 그들을 격려하는 네 개의 또 다른 복을 추가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자들을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또 다른 복으로 격려하여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살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부자들에 대한 이러한 배려는 주님 탄생 이야기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즉,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목자들이 방문하였으나, 마태복음에서는 부유한 동방박사들이 방문했던 것이다. 이렇듯 팔복설교는 초대 교회에서 유력한 영향력을 미쳤던 부자 성도들을 격려하는 내용으로 인하여 마태복음을 타 복음서와 구별시키는 근거가 되고 있다.


/교수·천안대 기독신학대학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