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기독교 유적지의 역사와 의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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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기독교 유적지의 역사와 의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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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1.04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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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주교수/감신대 한국교회사

원산수양관은 남감리회 선교사들이 주도하고 미감리회 선교사들이 참여해 ‘감리교’ 중심으로 운영됐다. 원산은 1893년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이래 남감리회와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가 함께 선교하는 선교 공동구역이 되었던 바 선교 초기부터 여름에 선교사들이 ‘사경회’를 열어 신앙 재충전의 기회로 삼았다. 1903년 6월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R. A. Hardie)가 원산에서 선교사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강력한 ‘성령 체험’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원산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연결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런 ‘사경회’와 ‘부흥운동’ 전통을 갖고 있던 원산이었기에 여름이면 선교사들이 모여 성경공부를 하면서 해변에 나가 휴식을 취했는데 그것이 발전하여 여름 수양관 설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원산 구세병원에서 일하던 남감리회 의료 선교사 로스(J.B. Ross)와 같은 선교부 소속 문서 선교사 터너(V.R. Turner)가 선교사를 위한 여름 수양관을 원산에 설립할 생각을 갖고 있던 중,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명사십리 해변에 부지를 구입하고 서울에서 활동하던 같은 선교부의 데밍(C.S. Deming) 선교사와 미감리회 노블(W.A. Noble) 선교사 등을 끌어들여 ‘원산수양관협의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수양관 사업에 돌입하였다.

소래수양관처럼 원산수양관도 반응이 좋았다. 분양 신청자들이 늘어났고 ‘양관’ 집들도 늘어났다. 원산수양관은 소래수양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했다. 원산수양관은 소래수양관과 마찬가지로 ‘서양’ 환경으로 조성됐다.

원산수양관이 이처럼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창설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수양관을 개발하고 발전시킨 결과였다. 원산수양관협의회에 참여한 분양권자들은 친목·음악·실행·건물위원회 등으로 나누어 보다 쾌적하고 효율적인 수양관이 되도록 연구하고 활동했다.

그 결과 원산수양관을 찾는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이 늘어났다. 더욱이 원산은 교통 사정이 좋아 경원선 기차로 서울과 바로 연결됐고 배편으로는 일본과 시베리아, 만주로 연결돼 여름이면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던 외국인들도 상당수 원산수양관을 찾아왔다.

그리하여 원산수양관은 사업 개시 2년 만에 50명이 넘는 분양 신청자가 생겼고 건물은 16채나 들어섰다. 소래수양관과 마찬가지로 원산에도 3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과 도서실, 진료소, 세탁소, 우편소 시설을 갖추었고 어린이를 위한 수영장과 놀이방, 보육시설까지 갖추었으며 테니스, 야구, 골프, 농구, 배구 등 각종 운동을 할 수 있는 시설도 구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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