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르’가 통치하는 제정 러시아에서 태어나 이집트와 인도, 일본을 거쳐 조선 땅에 들어왔던 24살 청년. 그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영어권 국가에서 주로 파송되어온 선교사들과 달리, 그는 영어를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성서공회 소속의 외국인 최초의 권서가 된 청년은 조선팔도를 누볐다. 목사안수를 받지 않았고 교단이나 교회의 파송 선교사도 아니었던 청년은 최초로 구약성경을 조선말로 번역한 인물이 됐다. 바로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한국명 피득)가 그 주인공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편 23편이 이처럼 유려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피터스 선교사를 이 땅에 보내셨다.
주님 만나기까지 지구 반 바퀴
오늘날 우크라이나 드니프로(Dnipro)에서 태어난 피터스의 본명은 ‘이삭 프룸킨’(Aisik Frumkin)이었다. 유대교 전통과 종교의식에 철저했던 가풍 아래, 유대인 회당학교를 다니면서 일찍부터 히브리어를 배우며 시편을 암송했다. 러시아에서도 유대인은 상당한 차별은 받았다. 생활고에 시달렸고, 심지어 러시아인들의 유대인 대상 폭력 ‘포그롬’(pogrom)이 자행됐다. 군 복무를 마친 이삭은 1894년 9월말 새 삶을 찾기로 하고 고향을 떠났다. 부모님께서는 항구도시 ‘오뎃사’로 가겠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는 호주로 갈 심산이었다.
먼저 이집트 포트사이드로 간 ‘이삭’은 일하며 용돈을 벌었다. 호주에서 일자리가 마땅치 않다는 소문을 듣고는 행선지를 인도로 바꿨다. 인도 뭄바이에선 임금이 너무 낮았다. 잠시 콜카타에서 만난 개신교회에 호감이 생겼지만, 안정된 삶을 찾고자 했던 청년의 모험은 계속된다. 다시 싱가포르로 옮긴 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완성될 것이라는 이야기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갈 마음이었다. 기착지와 같이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고향을 떠난 지 6개월 만에 도착한 일본에서 피터스의 삶에 대변혁이 일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 배편을 기다리던 중 인도에서 경험했던 개신교에 대한 호기심으로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교회에서 독일어를 할 줄 아는 미국인 목사 알버터스 피터스를 만났다. 2주간 독일어로 배움을 받은 이삭은 마침내 주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 ‘이삭 프룸킨’은 세례를 준 목사의 이름을 따라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로 바뀌었다.
역사적 의미 큰 『시편촬요』 번역
정통파 유대인 청년이 세례를 받고 개신교인이 됐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미국성서공회 일본 주재 책임자 헨리 루미스 목사가 피터스를 찾아가 만났다. 조선에서 ‘권서’(勸書)로 활동할 것을 제안했고, 그렇게 1895년 5월 13일 제물포항으로 입국했다.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무어 선교사와 한 차례 전도여행을 다녀온 이후 곧장 자신감을 얻는 그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등 전국을 홀로 다녔다. 당시 선교보고서를 보면, 피터스는 10~20일, 50~70일 일정으로 시골 구석구석까지 복음을 들고 찾아갔다. 1896년에는 단 6개월 동안 2,600권의 복음서와 274권의 신약성경을 판매해 최고 실적을 거두기도 했다.
헌신적인 사역은 조선말을 능통하도록 그를 이끌었다. 선교사들이 말과 글을 배우기가 고역이었지만, 그는 스스로 “새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보고할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피터스는 구약성경을 빨리 번역해 사람들이 읽도록 해야겠다는 뜻도 품었다.
당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를 중심으로 성서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지만, 신약 번역에 우선 집중하면서 구약 번역은 엄두도 나지 않을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피터스는 어렸을 때부터 히브리어로 암송하던 ‘시편’을 사적으로 번역했고, 1898년 『시편촬요』를 출간하게 된다. 구약학자 박준서 박사는 “『시편촬요』는 한글로 번역, 출판된 최초의 구약성경이라는 역사적 의미 외에도 순한글, 띄어쓰기, 히브리어 원문으로 번역 등의 의미가 크다”면서 “한국어를 배운지 2년 남짓한 사람이 번역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번역이다. 하나님은 언어의 천제를 제정 러시아에서 한국까지 보내주신 것”이라고 호평했다.
조선에서 정식 목사선교사로
『시편촬요』는 빼어난 번역이었지만, 개인의 번역작업으로 당장 공신력이 부족했다. 더구나 신학을 공부하지 않는 그에 대한 지지도 부족했다. 이후 피터스는 신학공부를 결심하고 미국 맥코믹신학교에서 유학했고, 그곳에서 목사안수까지 받았다. 1902년 최우등생으로 졸업하며 교수가 될 가능성도 컸지만, 그는 조선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선교부는 안수 받은 피터스를 필리핀으로 파송했다.
의외로 조선 선교부는 피터스의 파송을 반대했다. 당시 일본과 러시아 관계에 미칠 영향, 미국 중심 선교사들 속 이질감 등에 대한 우려였다. 피터스가 조선에서 사역하면서 문화적 차이를 경험했던 것도 사실이다. 피터스는 순종했다. 그리고 2년 후 1904년 9월 정식 목사이자 선교사로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서울 남부지역을 맡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20여 개 교회를 개척했다. 그즈음 공역 신약전서가 완성되고 번역자회는 구약성경 번역에 착수한다. 번역 책임자는 윌리엄 레이놀즈 선교사였고, 미국성서공회 루미스 목사는 서신을 보내 피터스를 적극 추천했다. 1906년 번역위원으로 정식 위촉돼 1911년 완성된 구역(舊譯) 『구약성경』 번역에 참여했다.
한편, 1906년 아내 엘리자베스 캠벨이 조선에서 병환으로 별세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결혼 생활은 불과 3년 5개월이었다. 사별 후 2년 뒤 의료선교사 에바 필드와 재혼했다. 1911년 안식년을 다녀온 후에는 황해도 재령으로 사역지가 변경됐다. 1921년 다시 안식년을 가진 후에는 평안북도 선천으로 파송돼 목회했다.
구약성경 개역에 중추 역할
번역자회는 구약성경 출간 후 곧바로 개역자회(The Board of Revisers)로 개편돼 구약성경 개정 번역에 착수한다. 특히 번역이 어려운 구약성경을 단기간에 번역한 만큼 개역은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번역 원칙을 두고 진통을 겪으며 일정이 늦어지던 중 1926년 피터스는 구약 개역자회 평생위원으로 임명됐고, 개역 작업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재혼했던 에바 필드가 위암으로 35년 선교 사역을 마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피터스는 구약 개역에 더 매진하면서 슬픔을 달랬다. 노년에 접어든 레이놀즈 선교사는 실질적으로 개역 작업에 참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피터스를 주축으로 진행한 끝에 1937년 8월 구약성경 개역 작업이 완수됐다.
1895년 조선에 왔던 청년은 46년 선교를 마치고 1941년 은퇴 후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엄연히 그에게는 낯선 땅이었다. 다행히 두 아들이 공부하던 프린스턴대학교 내 선교사들을 위한 숙소에서 1년 동안 머물다 LA 인근 패서디나에 정착했다. 그리고 1958년 그곳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