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궁멀 전씨 전위렴”, 목숨 바쳐 뿌린 복음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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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궁멀 전씨 전위렴”, 목숨 바쳐 뿌린 복음의 씨앗
  • 이인창
  • 승인 2024.04.03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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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⑧ 호남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맥클리어리 전킨

1893년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된 7인의 선교사 중 한 사람, 윌리엄 맥클리어리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 1865~1908, 한국명:전위렴) 선교사는 호남지방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특히 전주와 군산을 중심으로 사역하며, 수많은 교회를 개척해 복음의 씨를 뿌렸다. 

목사였던 할아버지와 판사 아버지를 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레이놀즈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나 유니온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891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 전역을 순회 중이던 언더우드 선교사와 조선인 윤치호의 강연을 듣고 조선 선교를 결단했다. 목사안수를 받고 기도로 준비하던 조선 땅에 입국해 주로 서울과 군산에서 사역했다. 

몸을 돌보지 않고 사역하던 그는 43세라는 이른 나이에 전주에서 별세했다. 생전에는 어린 아들을 이 땅에 묻어야 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는, 그의 가족은 사역을 포기하지 않았고, 소망으로 뿌린 복음은 지금까지도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다. 

미개척지 ‘충청’과 ‘호남’ 맡아
보통 ‘7인의 선발대’로 알려진 미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떠나는 출국일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다. 전킨은 후두염으로 일주일 동안 덴버에서 머물면서 출국이 제일 늦었다. 먼저 일본에 도착해 있던 테이트와 매티 선교사는 나중에 도착한 레이놀즈와 전킨을 만나 한국에 대한 정보를 듣고 언어를 준비했다. 

7인의 선발대 중에서도 가장 먼저 조선에 도착한 사람은 여선교사 데이비스였다. 나머지 6인은 1893년 11월 3일 제물포항에 도착했고, 서울에서 먼저 사역하던 선교사들을 돕고 어학공부를 하면서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준비했다. 국내 장로교 선교사들이 모여 ‘장로교선교부공의회’를 조직하고 사역지를 조율했을 당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아직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지 않았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맡게 됐다. 미 북장로교는 황해도와 평안도, 서울지역을 맡았고, 호주 장로교는 부산을 거점으로 경남지역 선교를 펼치게 됐다. 

1893년 남장로교 선교부 책임자였던 레이놀즈는 선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인 정해원을 전주로 선발대로 내려보냈다. 영문학을 전공했던 전킨은 그 사이 조선말의 언어학적 특성을 연구하면서 빠르게 말을 익혀갔다. 낯선 땅에서 경사를 맞기도 했다. 1893년 6월 아들 조지 전킨이 태어난 것이다.

군산에 내린 선교의 뿌리
전킨 선교사는 사역 내내 복음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투혼을 펼쳤다. 조선의 무덥고 습한 여름은 선교사들을 무척이나 힘들게 했다. 산속 사찰에서 첫 무더위를 넘긴 전킨은 테이트와 함께 답사 차원에서 청주를 거쳐 전주로 향했다. 여행 중 한번은 홍수에 휩쓸려 죽을 뻔한 위기도 있었다. 지나가던 조선 사람의 구조로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던 1894년 안성에서 전도사역을 펼치기도 했지만, 피습을 우려한 미 영사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철수한 적도 있다. 서울에서는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함께 거리전도에도 열심이었다. 1894년에는 차남까지 태어나는 경사를 맞았다. 하지만 같은 해 여름부터 무더위 여파로 앓던 장남 조지는 생후 18개월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고통스러웠지만 그의 선교는 멈추지 않았다. 

선교부 공식 파송을 받아 전킨은 의료선교사 드루와 함께 군산에서 본격적인 사역을 준비했다. 같은 시기 테이트와 레이놀즈는 전주로 임지가 결정됐다. 1895년 군산에 도착한 전킨은 드루와 함께 오전에는 전도하고 오후에는 환자를 진료했다. 동시에 선교사역을 위한 거점으로 군산 선교스테이션을 준비했다. 주변 지역을 답사하면서 사역 계획을 수립했다. 김봉래와 송영도라는 조선 사람이 전킨을 찾아와 세례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해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군산에 머물며 전킨은 주택 2채를 미리 매입해 두었고, 1896년 4월 5일 정식으로 부임했다. 부임 후 세례를 요청했던 두 사람을 석달 동안 교육한 후 세례를 베풀었다. 호남지역 최초의 세례식이었다. 전킨에 의해 첫 교회가 군산에 조직되었고, 드루에 의해 병원도 문을 열었다. 1896년 11월 데이비스까지 합류하면서 군산교회는 여성반, 소녀반, 소년반 등으로 사역을 더욱 확장했다. 

전킨 선교사는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복음 전파를 위해 사명을 다하다 43세를 일기로 주님 품에 안겼다. 사진은 조선 선교 당시 전킨 선교사와 가족.

몸을 아끼지 않는 선교 투혼
전킨은 몸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사역했고 풍토병에 걸리기도 했다. 동료 선교사들의 최대 기도제목이 전킨의 건강 문제이기도 했다. 급기야 미 남장로교 선교부는 1898년 전킨을 일본으로 보내 쉬도록 명령했다. 가족들과 일본에 머물던 전킨은 금방 혼자 돌아왔다. 군산이 일본 주도의 개항장이 될 경우, 터를 닦던 선교스테이션을 빼앗길 것을 염려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밀려들자 스테이션을 수덕산에서 구암동산(궁멀)으로 옮겼다. 구암동산에 주택을 마련했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구암교회 또는 궁멀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전킨은 몸이 상하면서도 책임을 다했다. 군산에서 초기 생활은 열악했고, 가족들 역시 큰 고통을 겪었다. 슬픔이 다시 찾아왔다. 군산에서 태어난 아들 시드니가 생후 10일 만에 사망하는 일까지 겪었다. 전킨은 그 아기의 시신을 상자에 넣어 군산 언덕에 올라 땅에 묻었다. 전킨은 오히려 성도들을 위로하는 설교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전킨 가족은 1900년 5월부터 1901년 10월까지 미국에 안식년을 떠났다. 그는 미국에서도 순회하며 조선 사역을 소개했고, 11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소중한 동료 드루는 안타깝게도 미국에 들렀다 군산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역시 헌신적으로 사역하던 드루는 선교부에 의해 귀국조치 됐고 건강상 문제로 남게 됐다. 

다행히 전킨과 드루가 뿌린 복음 씨앗은 무럭무럭 자랐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더 파송되면서 사역은 탄력을 더했다. 1902년에만 77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전킨은 지역을 순회하며 각처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성례를 베풀었다. 

전킨은 사랑방에서 남학교를 열었고, 이 학교가 훗날 영명학교로 발전한다. 전킨 부인은 안방에서 여학생들을 모아 교육했고, 멜볼딘여학교가 되었다.

“이 땅에서 행복했습니다”
전킨은 장마철 순회 전도를 하던 중 시골 우물물을 마시고 다시 이질에 걸리고 만다. 선교부는 몸이 쇠약해진 전킨의 사역지를 군산에서 전주로 옮겼다. 근교 20리 밖으로 순회 전도를 가지 말도록 단서도 달았다. 건강을 염려한 결정이었다. 그는 전주에서도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복음 전파에 힘썼다. 헌신적인 사역으로 복음의 열매가 맺혔지만, 1907년 성탄절 즈음 결국 폐렴에 걸린다. 그리고 이듬해 1월 2일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긴다. 죽음을 앞둔 그는 “나는 궁멀에 묻어주기 바랍니다. 정말 행복했습니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는 43세에 불과했다.

가장을 잃은 아내 메리 레이번과 5명의 자녀는 그해 4월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전킨이 세운 학교는 ‘전킨을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기전학교로 명명됐다. 이곳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훗날 한강이남 지역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전킨은 이른 나이에 천국으로 가게 됐지만, 자신을 “궁멀 전씨 전위렴”이라고 소개했던 그의 사역 유산은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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