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487주년 기획: 종교개혁 정신과 일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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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487주년 기획: 종교개혁 정신과 일 Work
  • 승인 2004.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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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화 넘어 귀족주의 뚜렷, 개혁은 쇠퇴

우리나라 교회가 개혁을 추진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반대로 개혁대상으로 종종 입에 오르내리는 이면에는 끝 모르고 진행되는 ‘교회의 비만증’이 존재한다. 이 증세는 단순히 교회의 외모가 커졌다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외형만큼 변해버린 교회의 그 속 내용 때문에 증세의 심각성을 더해 준다. 결국 겉모습을 거대하게 만들어 버린 교회성장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평범한 성도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어 ‘귀족주의’를 양산하고 있으며 이같은 추세는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는 세속사회의 여피의식(Yuppie)과 결합해 ‘구속이전의 노동으로 회귀’하려는 사악한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거룩한 일과 천한 일의 차별을 없애버린 종교개혁 정신은 오늘날 교회의 귀족화 도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편집자 주

승천하신 예수님이 언제다시 오실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단지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치 도둑처럼 이 세상에 오실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그들이 살아있을 때에 일어날 사건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초대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이 팽배해 갔고 일부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준비에 매일매일을 살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생업을 포기하고 그저 재림에 필요한 행위들, 이른바 찬송과 기도 복음전도 묵상 등 주님이 기뻐하실 것들을 미리 예측해서 열심을 냈던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분위기가 길어지자 초대교회에는 서서히 불평이 나타났다. 지금과 달리 사회적으로 분화가 더뎠고 노동종류가 상당히 제한적이었던 2000년 전의 팔레스타인지역에서 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됐을지 한 번 생각해 보면 초대교회의 재림준비는 단순히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문제로 비화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미국의 기독교대학연맹이 발간한 단행본 ‘왜 일을 하는가?’(Why work?)는 재림준비에 바쁜 부류의 사람들이 먹을 양식을 다른 사람들이 충당해야 했고 이같은 일은 시간이 길어지면서 불평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즉 재림준비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강도는 예전보다 더 짙어졌을 것이어서 공동체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얘기다.

사도 바울은 이런 상황을 초대교회 지도자답게 복음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10절의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바울의 거친 말투는 데살로니가교회의 이같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복음적 처방이었던 것이다. 즉 재림준비와 노동은 전혀 무관한 것으로, 그렇게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너무나 영적이어서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비꼼이 반영된 것이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자. 초대교회가 당면했던 2000년 전의 이같은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교회가 지금 얼마나 될 것인가. 지극히 성스럽고 거룩해서 세속적인 노동을 꺼려했던 중세교회마저도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개혁대상으로 전락했던 원인이 어디에 있을지 집어보는 일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바로 지금 우리들이 당면한 문제와 유사한 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들 중 흔히 꼽는 것은 ‘교회의 대형화’다. 크기가 커짐으로써 자체 유지비용도 증가한 데다 거대한 몸집에 집중된 사회 유력인사들의 파워가 신앙공동체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는 것이 교회대형화를 비판하는 핵심내용들이다. 과거에는 진보권에 속한 소수 목회자들 사이에서 지적된 교회대형화 비판추세가 어느덧 복음주의권 속에서도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개혁과제로 다루어질 만큼 교회대형화 문제는 이제 진보와 보수권의 공통 관심사가 됐다.

여기서 우리가 현미경을 동원해서라도 자세히 보아야 할 점은, 대형화 뒷면에 숨겨진 또 다른 그림자, 소위 교회의 귀족주의 현상이다. 대형화한 교회건물은 화려하다. 화려한 예배당 공간에 나오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극단적으로, 하층민이 많을까 아니면 상층민이 많을까. 답은 자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대형화가 비판받을 이유는 건물 유지비용 증가나 교회의 권력화만이 아니라 복음의 자유로움을 가로막는 ‘귀족주의 팽배현상’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대형교회들을 생각해 보자. 당회원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갖는 직업은 무엇들인가. 혹시 일용직에 종사하는 사람은 있는가. 여성의 경우 작은 식당에서 주방 일을 하거나 고깃집에서 식사를 나르는 소위 서빙직에 종사하는 사람은 있는가. 시장에서 야채장사를 하거나 비린내 나는 생선을 파는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 요즘 나오는 표현대로 건강한 교회로 거듭나려면 이런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골고루 흡수돼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종교개혁정신을 계승한다라고 한다면, 직업이나 노동종류가 교회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나라 교회의 귀족주의는 사회적으로 ‘여피의식’(Yuppie)에 비교될 만하다. ‘여피’란 제2차 대전을 전후로 미국의 대도시 근교에서 태어난 부유한 젊은 엘리트층을 일컫는 말이다. 북미주에서 한 때 각광받던 여피의식은, 개인적인 물질획득과 사회적인 위신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이 신분상승에 집착하는 경향이다. 이같은 경향은 직업선택을 위해 사회적인 신분상승과 재산확장을 기준으로 삼곤 한다.

큰 건물과 재산을 소유했던 솔로몬의 고백록, 전도서 2장4절-11절의 말씀은 개인적인 신분상승을 위한 또 재력강화를 위한 직업선택은 모두 ‘헛된 것’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어에서 ‘헛됨’과 ‘우상’이 같은 단어인 점을 전제하면, 결국 재산증식과 신분상승의 도구로서 노동(직업)은 우상숭배의 한 형태가 되고 만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복음능력을 통해서 우리 인간 주변의 무수한 우상들을 깨트려야 할 교회가 오히려 대형화를 성장이라고 추켜세우는가 하면 사회적인 여피의식과 결합해 교회 안에서 우상숭배의 위험성을 방치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피의식에 사로잡힌 교인들은 직업(노동)을 개인적인 안락과 행복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신이 내려주신 복으로 결론짓는다. 그러면 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과 무관한 사람들인가. 이런 의미에서 데살로니가교회와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전인적이라고 한다. 이는 육체와 영혼 그리고 우리의 정신과 심지어 우리가 하는 일 모두가 구속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말이다. 혹시 일을 통해서 개인과 가족의 안락을 꿈꾸는가. 복음은 이것을 죄로 오염된 노동의 모습이라고 슬퍼하며 예수의 구속사건을 통해 거듭나길 요청한다. 적어도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하고자 노력하는 교회는 성도들이 하는 모든 일들을 ‘이웃에 대한 섬김’이요 ‘하나님에 대한 창조사역 동참’이라는 점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곳이어야 한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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