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3주체로 학생, 교사, 학교를 든다. 그런데 여기에 학원의 역할이 커지면서 교육의 주체는 학생, 학교, 학교 교사, 학원, 학원 교사로 늘어났다. 우리의 유·초중고 교육은 모두 대학입시에 목표가 맞춰져 있다. 학원이 선행학습을 마구 하다 보니, 정해진 교과과정대로 수업을 진행하는 학교는 학생들이 학원에서 배운 걸 뒤늦게 다룰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러니 학부모나 학생들은 학교보다 학원에 더 의존하게 됐다. 교사들에 따르면 학생들의 학습 태도는 심각할 정도로 불량하다고 한다.
학부모나 학생들이 학교보다 학원을, 학교 교사보다 학원 교사를 더 의존하게 되면서, 학부모들이 학교 교사를 폄하하고, 아이들도 그걸 따라 하면서 교사의 권위는 무너진 지 오래다. 이렇게 된 데에는 ‘교육’이 입시 준비과정으로 전락하고, 사회가 ‘된 사람’보다 ‘난 사람’을 찾기 때문이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자존심마저 손상되자, 교사들이 학교를 떠나기 시작한 지 오래다. 얼마 전 젊은 교사가 이를 이기지 못하고 우리 곁은 영원히 떠나면서 우리 교육의 민낯과 교사들이 처한 상황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부모들의 학교 교사 괴롭힘이 큰 사회 문제로 등장해버렸다.
‘니네 선생’을 ‘너의 선생님’으로
고쳐 불러야
‘라떼는…’ 한 마디! 옛날에는 가정방문이란 게 있었다. 선생님이 가정을 직접 방문해서 부모와 아이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가정교육 환경을 살피는 기회였다. 그런데 이게 지나친 접대와 촌지 같은 부작용이 생기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선생님의 가정방문 때 우리네 부모는 선생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선생님을 높였던 기억이 난다. 그걸 보며 우리는 선생님을 ‘굉장히 높은 사람’으로 여겼다.
어떤 초등학생이 식물에 관한 숙제를 하다가 모르는 문제를 아버지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마침 아버지는 식물학 전공 교수였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께 여쭤보라고만 했고, 아이는 선생님은 잘 모를 거라고 했다. 그 다음 날 학교를 다녀온 아이는 “우리 선생님 실력 있다!”며 놀라워했다. 전날 밤 아버지는 자세한 정보를 정리해서 선생님에게 보내주며, 아이가 내일 물으면 대답을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어떤 이가 SNS에 미국 어느 초등학교의 가정 통신문 내용이라며 게시한 글이다.
* “안녕하세요?” “부탁합니다!” “환영합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와 같은 아주 유용한 표현들은 모두 가정에서 배우기 시작해야 합니다.
* 또한 아이들은 정직함, 약속시각 지키기, 부지런함, 동정심 느끼기, 어른과 선생님을 존중하기 역시 가정에서 배워야 합니다.
* 청결히 하기, 입에 무언가 들어있을 때에는 말하지 않으며, 쓰레기를 어디에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는 가정에서부터 배우게 됩니다.
* 또한 정리하고 계획하는 방법, 소지품을 잘 관리하는 법, 아무 때나 다른 사람을 만져서는 안된다는 것도 가정에서 배웁니다.
* 여기 학교에서는 언어, 수학, 역사, 지리, 물리, 과학, 체육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단지 아이들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교육을 더 심화해줄 뿐입니다.
부모를 1차 교사라 하고, 학교 교사를 2차 교사라고 한다. 1차 교사가 가정에서 가르쳐야 할 일과 2차 교사가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일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보다 교사의 언행과 태도를 더 배운다. 부모가 가정에서 담당해야 할 일을 학교 교사에게 떠넘기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당면한 교육의 문제를 당장 해결해나갈 묘책은 없는 듯하다. 그래도 우리는 아주 작은 실마리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그건, 학부모들이 학교 선생님을 존중하는 것이다. “니네 선생”을 “너의 선생님”으로 고쳐 부르는 것! 그것이 진정 내 아이를 위한 일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거든 먼저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곧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이다.(마태복음 7:12, 새번역)
(사)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